성장 인정 욕구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 대다수가 귀찮아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녹색교통 봉사대 활동이다. 등굣길 아이들 안전을 책임진다는 보람도 있지만, 가능하면 안 하고 싶은 게 많은 학부모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보통 1년에 두 차례 정도 녹색교통 봉사를 하는 것 같다. 나는 별아가 1학년 때부터 5학년인 지금까지 꾸준히 참여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봉사 장소도 늘 같은 곳을 골랐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놓인 삼거리, 봉사자들의 기피 1순위인 장소다. 좌회전 차, 우회전 차, 직진 차가 한 번에 몰리면 정신이 없어지고 위험하기도 한 장소라서 그렇다. 봉사자의 수신호를 무시하는 운전자도 심심찮게 있어서 몇 걸음 차도로 뛰어들어 녹색깃발로 막는 모험도 감수해야 한다. 내가 무슨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은 아니지만, 별아와 같은 어린이들에게 뭔가 해준다는 마음으로 늘 이곳을 신청했다.
운전자도, 보행자도 대부분 봉사자의 수신호와 안내를 잘 따라준다. 참 고마운 일이다. 등교시간이자 출근시간이라 모두 바쁘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만 할 텐데, 법적 권한도 없는 사람의 교통지도를 따르며 인내하는 것이 나는 감사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봉사자의 교통지도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소수이지만, 이 소수의 행동이 여러 사람을 불행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소수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교통지도에 나서는 시간은 보통 오전 8시부터 9시까지다. 엄마 손 잡고 어린이집 가는 아이부터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아저씨, 아줌마, 어르신들 모든 연령대를 만난다. 중학생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교통지도를 가장 잘 따르지 않는 연령층은 중학생이다. 의외로 고등학생들이 더 말을 잘 듣는다. 다만 이건 내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니 중학생들은 너무 화내지 말도록!
최근에 나선 교통지도에서 겪은 일이다. 여자 중학생 셋이 횡단보도 건너편에 모여들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건너올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서 재잘재잘 웃고 떠들기만 했다.
‘친구 기다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여학생들에게 신경을 기울였다. 중학생들의 경우 갑자기 길로 뛰어드는 일이 때때로 있기 때문이다. 마침 그날은 내 맞은편을 지켜야 할 봉사자가 결석을 해서 더 신경을 썼다.
이윽고 여학생 무리 중 한 명이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휙, 뒤를 돌아보니 여학생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리는 친구가 쟨가 보구나.’
나는 다시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 한 대가 좌회전 깜빡이를 켠 채 달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보행자를 막아야 할 시점이었다. 나는 깃발을 들어 친구들에게 가려는 여학생을 막고 차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그 여학생이 손으로 깃대를 탁 밀며 횡단보도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위험하다!”
내가 소리쳤지만 여학생은 아랑곳없이 그대로 달려갔다. 뒤늦게 그 여학생을 발견한 운전자가 끽, 급정거를 했다. 여학생도 차에 치일 뻔한 걸 느꼈는지 우뚝 멈춰 섰다. 운전자가 기민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인명사고를 피할 수 없을 위험한 순간이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다음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여학생이 운전자에게 미안함의 표시로 목례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뻔뻔하게도 곧장 친구들을 향해 걸어갔다. 친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구를 반겨주었다. 넷이 된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제 갈 길을 갔다.
정말 고맙게도 운전자 아저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여학생이 다 건너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짧은 시선을 한 번 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마치 그 시선에 ‘아저씨도 그냥 참아요’ 하는 한마디가 담긴 듯했다. 하긴, 참지 않으면 뭘 어쩌겠는가. 사고가 안 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잊는 수밖에.
집에 와서 곰곰 되새겨 보았다. 사고를 당할 뻔한 여학생이 운전자에게 인사도 없이 간 건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었다.
‘뭐, 놀라서 인사할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지.’
그러나 나한테 한 행동은 도무지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교통지도를 따를 마음이 없을 순 있어. 그럼 그냥 날 무시하고 건너든지, 깃대는 왜 밀어?’
깃대를 미는 여자 중학생은 처음이었다. 역대급에 레전드급이었다. 훗날 똑같은 행동을 저지를 여자 중학생이 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성장기, 특히 중학생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그때가 참 애매한 시기이기는 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고등학생처럼 몸이 커서 어른인 척 세상을 속이기도 쉽지 않은 시기. 하지만 애 취급받기는 몸서리나게 싫었던 시기. 그래서 나는 중학교 때 반항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나도 이제 컸어요!” 소리 치고, 티내고 싶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엔 그나마 철이 조금 들어서 순응할 수 있는 여유도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엔 엇나가려는 마음에 휩싸여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그 마음을 ‘성장 인정 욕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깃대를 밀었던 여학생에게도 어쩌면 성장욕구 심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중학생 시절은 그런 시절이다!
그렇다면 어른인 나는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까? 아, 정말 모르겠다. 동네 아저씨인 주제에 뭘 하려고 마음먹는 자체가 주제넘은 행동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한 가지는 꼭 해야겠다. 미성년자(성년자도 ‘성년스럽지’ 못해서 이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중에서 교통지도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만나면 쫓아가서 막을 거다.
반드시! 누가 뭐래도 녹색교통 봉사대에게는 안전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