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2. 창덕궁 선정전
왕비 간택을 위해 궁에 모인 여자들은 나를 비롯해 모두 열여섯 명이었다.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똑같이 맞춰 입은 여자들이 열여섯이나 모여 있으니,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자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선정전 앞뜰에는 봄볕이 사뿐사뿐 내려앉고 있는데.
‘청국 칙사는 왜 안 오지? 간택이 빨리 시작되면 좋겠는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간택을 돕기 위해 불려온 상궁들을 쳐다보았다. 세 명 모두 나이가 지긋해 보였는데,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 오랑캐에 팔려가는 신부를 뽑는 일에 끼게 된 것이 서글픈 모양이었다.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선정전 기와를 맞고 튕겨 나온 햇빛에 눈을 찔렸다. 손으로 눈을 비비다가 문득 선정전 지붕은 왜 푸른색 유리 기와로 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전각들의 지붕은 모두 검은색 돌기와인데.
본디 창덕궁의 선정전은 임진년 전란(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다. 지금 서 있는 전각은 선왕 인조가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부터 푸른색 유리 기와였을까? 아니면 인조 임금이 새롭게 푸른색 유리 기와를 얹은 것일까?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는데,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졌다. 왕실의 일은 왕실 사람들만 알 수 있을 뿐, 백성들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 같은 종실도 왕실의 일을 까맣게 모르는데, 왕족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래서 임금은, 이 나라 벼슬아치들은 더욱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전란을 겪은 것, 지금 꽃다운 처녀들이 오랑캐에게 팔려가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 모두 백성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선정전의 현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현판에 적힌 세 글자, ‘선정전’을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읽었다. ‘선정’, 백성에게 베푸는 정치. 이 나라가 과연 백성에게 베푼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 선정전 나들문인 선정문으로 앳된 얼굴의 궁녀가 한 명 들어왔다.
“청의 칙사가 곧 오실 겁니다.”
그러자 나이가 가장 지긋해 보이는 상궁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모두 줄을 서세요.”
상궁의 말에 열여섯 여자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섰다. 모두들 줄을 선 채 선정문을 힐끔거렸다. 나도 안 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선정문으로 눈길이 갔다.
청나라 칙사의 정사*는 태보라고 했다. 태보는 황제를 보좌하는 벼슬로 조선의 우의정과 그 지위가 비슷하다. 왕비 간택을 위해 이렇게 높은 관리를 보낸 도르곤의 권력을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드디어 청나라 칙사가 수행원들과 함께 선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하마터면 나는 흡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칙사의 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자가 웃음을 자아냈다. 꼭 머리에 만두를 얹어놓은 꼴이었다. 칙사는 청색 비단옷 차림이었다. 화려한 비단옷에 ‘만두 모자’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비록 차림새는 우스웠지만, 칙사의 눈빛은 보라매처럼 살아 있었다. 나긋나긋한 인물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긴 칼을 차고 칙사를 따르는 수행원들은 독 오른 사냥개들 같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칼을 겨눌 듯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관조차 우리의 기를 죽이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조선 역관의 도움을 마다하고 모든 통역 업무를 도맡았다는 그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정사: 칙사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칙사는 곧바로 줄의 첫 번째 여자 앞에 떡 섰다. 그러고는 뒷짐을 진 채 여자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상궁들이 잰걸음으로 다가오자 그는 손을 들어 물러서라고 지시했다. 나는 칙사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랐다. 상궁들도, 간택을 위해 모인 여자들도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왕비 간택에서는 상궁에게 자세한 심사를 맡기고, 왕족들은 발을 치고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도리다. 그런데 청나라 칙사는 상궁들을 허수아비처럼 세워 두고만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몸으로 버젓이 여자에게 얼굴을 들이대는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래서 너희가 오랑캐구나!’
나는 청나라 칙사를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비웃을 수만 있을 뿐,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막을 힘이 없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조선의 법도를 무시하는 칙사의 행동을 보고 있으니, 비로소 선정전에서 간택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에 나는 간택 장소가 선정전이라는 사실에 다소 의아해 했었다. 선정전은 임금이 나랏일을 하는 편전이다. 간택은 편전이 아닌 내전*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청나라가 조선을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정전을 택한 게 틀림없어.’
화가 났다. 그러나 화를 낼 용기가 없어 허리만 꼿꼿이 세웠다.
줄의 아홉 번째, 내 차례였다. 앞의 여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칙사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 싫어서 아예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무서우냐?”
조선말? 역관이 한 말이 아니었다. 청나라 칙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내 입도 뻥긋 안 하던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 조선말이라는 게 놀라웠다.
‘무서우냐고? 내가 무서워서 눈을 감은 줄 아는구나!’
나는 반짝 눈을 뜨고 대답했다.
“나는 청의 칙사를 두려워할 만큼 겁쟁이가 아니오.”
그런데 칙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보니 간단한 말 몇 마디만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역관이 내 말을 청나라 말로 옮겨 주자 칙사는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분명한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웃음이었다.
칙사는 곧 웃음을 거두었다. 가자미눈을 뜨고 다시 한 번 내 몸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 시선을 견뎌냈다. 칙사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는 내 옆의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 그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입에 문 채 여자를 심사했다. 그가 여자를 심사하는 동안 나는 곁눈질로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챈 역관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노려볼 테면 어쩔 테냐? 이 천벌을 받을 오랑캐들아!’
당장 벼락이라도 떨어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하늘은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내전: 궁궐에서 왕비가 지내는 궁전. 중궁전이라고도 한다
“가마를 멈추시오.”
가마 안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버지가 마중 나오셨나 보구나.’
그렇다면 가마가 노루골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아침 일찍 궁궐에서는 나를 태워 가려고 가마를 보내 왔었다. 흰 천으로 휘장을 두른 사인교였다. 아버지와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노루골에서 몰래 가마를 맞이했다. 노루골은 노루가 종종 뛰노는 골짜기로 인적이 드문 곳이다. 아버지는 집안이 시끄러워지고 마을이 어수선해질까 봐 가마를 집에 들이지 않은 것이다.
가마에서 나오니, 역시 노루골이었다. 아버지는 가마꾼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고생 많았다.”
아버지는 짤막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바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왜 오늘 궁에 함께 가 주지 않으셨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궁에 가시는 분이.’
아버지의 등에 대고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버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가마꾼들이 떠나고도 한참 뒤에야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이미 아버지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 위로 드문드문 별이 돋고 있었다.
집 대문이 어린아이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열려 있었다. 먼저 집에 들어간 아버지의 자잘한 배려인 듯싶었다. 무심코 주먹을 쥐고 문 틈새로 넣어 보았다. 틈새보다 주먹이 커서 대문에 걸렸다. 문득 슬픔이 밀려왔다. 어쩐지 이 집에서, 이 나라에서 내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궁상떤다, 진짜! 아직 간택이 결정난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꾸짖고 당당하려 애쓰며 대문을 열었다.
“언니, 도대체 어딜 다녀 온 거야?”
애련이가 안마당으로 들어선 나를 보고 버선발로 달려왔다. 달려오는 애련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애련이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도리어 애련이가 움찔 놀랐다.
“왜 이래? 언니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나는 슬며시 포옹을 풀며 호호 웃었다.
“언니가 잘하는 건 없지만, 우리 예쁜 동생한테 잘못한 건 없는 거 같다.”
“싱겁긴. 안 하던 농을 다 치고. 근데 진짜 어디 다녀온 거야?”
“한양에. 아버지 심부름 다녀왔어. 친구분께 전할 서찰이 있어서.”
“뭐? 그런 건 종순이나 칠보를 시키면 될 텐데, 왜 언니를…….”
“노비들에게 맡기면 안 될 중요한 서찰이었나 봐. 내용은 나도 모르겠어.”
아버지와 입을 맞춘 대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이 있으면 재바른 날 시킬 것이지, 느려터진 언니를 시킨담. 나 같으면 애진 언니도 후딱 만나고 왔을 텐데.”
맏딸인 애진 언니. 언니는 지난해 봄 한양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 간 뒤로 아직 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니는 한 달 전쯤 시부모와 남편의 사랑을 받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보내 왔다.
“그러게. 애련이 네가 다녀왔으면 더 좋았겠구나.”
갑자기 내가 사는 서오리* 마을이 외딴섬처럼 멀게 느껴졌다. 서오리에서 한양은 길어야 하룻길인데…….
*서오리: 오늘날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