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3. 어름삐리
버나재비들이 접시를 뱅글뱅글 돌리자 구경꾼들의 눈동자도 뱅글뱅글 돌아갔다. 뒤늦게 찾아온 꽃샘추위가 몰고 온 찬바람이 한바탕 몰아치자 장구와 꽹과리가 질세라 흥을 돋았다. 접시는 더 빨리 돌아갔고, 코흘리개 아이들의 입은 약속이나 한 듯 딱딱 벌어졌다. 녀석들은 벌레가 입에 들어가도 모를 것만 같았다.
“아휴, 난 접시가 떨어질까 봐 겁나.”
애련이가 내게 팔짱을 꼭 끼며 말했다. 그런 동생이 오늘따라 더 귀여웠다. 예전엔 팔짱을 낄 때 귀찮은 적도 있었는데.
나는 애련이의 팔을 꼭 끌어당기며 물었다.
“너 추워서 팔짱 낀 거지?”
“아냐, 언니. 진짜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니까.”
나는 애련이 몰래 쿡쿡 웃었다. 애련이가 졸라서 오긴 했지만, 놀이판을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이 불어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그래서 마음은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기왕 나왔으니 즐겁게 놀자.’
사당패 놀음을 좋아하는 애련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놀이판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이틀 동안 혼인 문제로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나는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아내로 간택되었다.
청나라 칙사가 나를 선택했다고, 그제 궁에서 알려왔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질 만큼 큰 충격에 눈물마저 마른 것인지…….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한 달 뒤에 청나라로 떠나야 하니 모든 준비를 마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한 달,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모든 정든 것들과 헤어지는 일을 어떻게 한 달 만에 갈무리한단 말인가!
이틀 동안 밥 한 술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애련이가 모르게 태연한 척 행동하느라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었다. 꼼짝할 수 없었고, 꼼짝하기 싫었다. 그래서 오늘 놀이판에 가자는 애련이의 청을 거듭 뿌리쳤었다.
“자, 이제 살판 광대들이 한 판 신명나게 놀겠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꼭두쇠가 살판 광대들의 등장을 알렸다. 살판 광대 다섯이 휙휙 재주를 넘으며 마당으로 나왔다. 저마다 정신없이 땅재주를 부리더니, 덩치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광대가 마당 한가운데 기둥처럼 버티고 섰다. 그러자 조막만 한 살판삐리가 재주를 넘으며 덩치 큰 광대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새처럼 폴짝 날아올라 광대의 어깨 위에 사뿐 내려앉았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나도 짝짝짝 박수를 쳤다.
놀이판의 꽃인 줄타기 차례였다. 어름사니가 마당에 나오자 구경꾼들이 “와아!”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어쩐지 어름사니의 몸집이 무척 작았다. 어름삐리였다.
‘숙련된 어름사니가 안 나오고, 어찌 어름삐리가……. 바람이 세서 줄 타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
어름삐리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도 어름삐리가 등장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더 흥미롭게 여기는 듯했다. 소년이지만 여장을 하고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애련아, 왜 어름사니가 안 나왔을까? 이런 날씨에 어름삐리가 줄 타는 건 위험하지 않니?”
“별 걱정 다하셔. 어름삐리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꼭두쇠가 어련히 알아서 했으려고. 솜씨가 부족한 어름삐리는 놀이판에 안 내보네.”
나는 마당 한 구석에 서 있는 꼭두쇠를 힐긋 쳐다보았다. 꼭두쇠의 눈 속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꼭두쇠의 자신만만한 눈빛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다시 어름삐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름삐리는 줄타기 줄을 지탱하는 바지랑대 앞에서 ‘줄고사’를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일 몇 가지를 올린 조촐한 개다리소반 앞에서 어름삐리가 줄타기의 성공을 빌며 절을 올릴 때, 나도 눈을 감고 어름삐리의 안전을 빌었다. 조금 뒤 눈을 떴을 때, 어름삐리는 바지랑대를 매어 놓은 밧줄을 밟고 줄타기 줄로 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어름삐리가 줄 위에 오르자 구경꾼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마셨다.
풍악이 울렸다. 어름삐리가 눈을 더 크게 뜨더니 부채를 착 펼쳤다. ‘눈동자가 꼭 구슬 같구나!’ 느끼는 찰나, 힘 있게 한 발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줄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 잠시 멈칫했지만, 순식간에 줄 가운데에 이르렀다. 갑자기 어름삐리의 몸이 붕 떠올랐다. 하늘에서 어름삐리의 부채가 펄럭였다. 구경꾼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탄성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어름삐리는 다시 엉덩이로 줄을 튕기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외발로 착 내려섰다. 한 마리 학이 줄 위에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어름삐리가 내처 외발로 뛰어올랐다. 그 틈에 센바람이 도적처럼 불어왔다. 다시 외발로 내려선 어름삐리의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으아!”
구경꾼들의 비명과 함께 어름삐리가 떨어졌다. 풍악 소리가 뚝 끊어지고, 여기저기서 한숨과 걱정이 쏟아져 나왔다. 어름삐리는 땅에 얼굴을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광대들이 달려와 어름삐리를 멍석에 실어 데려나갔다. 동시에 살판 광대들이 다시 나와 재주를 넘었다. 북소리를 신호로 다시 풍악이 울렸다. 살판 광대들은 처음보다 더 어려운 동작으로 재주를 넘었다. 곧 구경꾼들의 한숨과 걱정은 탄성과 박수로 바뀌었다.
어쩐지 나는 무서웠다. 어름삐리가 잘못되었을까 무섭기도 했지만, 금세 잊고 놀이판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무서웠다.
“애련아, 어름삐리 괜찮을까? 아무리 광대지만 어린애가 다쳤는데, 놀이판을 끝내야 되는 거 아니니?”
“다치긴 했겠지만, 그래도 뭐 괜찮으니까 놀이판을 계속 이어가는 거 아닐까?”
애련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가?’
무심코 마당 한쪽으로 눈길이 갔다. 덧보기 광대들이 탈놀음을 준비하며 탈을 쓰고 있었다. 그들 곁에 서 있는 꼭두쇠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꼭두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꼭두쇠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고가 또 일어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문득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꼭두쇠는 이 놀음을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거구나!’
사당패는 즐거운 놀이를 선물하고 그 대가로 옷과 음식을 받는다. 구경꾼에게 놀이판은 그저 흥겨운 놀이지만, 사당패에게는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병자년의 전란은 백성들을 오랫동안 가난에 빠뜨렸다. 가난의 그늘은 사당패에게도 짙게 드리워졌다. 그래서 놀이판을 벌이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꼭두쇠는 사당패를 책임져야 하니까.’
놀이판을 멈출 수 없는 꼭두쇠와 사당패의 마음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그저 나는 어름삐리가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꿈틀거렸다.
‘내가 청의 섭정왕에게 시집을 가면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섭정왕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조선의 운명은 청나라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형편은 나아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늘처럼 어름삐리가 무리하게 줄타기를 하다 다치는 일도 줄어들 거야. 그 일을 내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섭정왕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불쑥 어름삐리가 나와 피를 나눈 동생처럼 느껴졌다. 사당패의 광대들, 이 자리에 모인 구경꾼들이 이웃사촌처럼 여겨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단단해졌다.
‘나는 기꺼이 도르곤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다녀오셨어요? 구경은 재미있게 하셨어요?”
종순이가 마당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놀이판에 다녀온 우리를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종순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종순이뿐 아니라 다른 ‘식구’들에게도 미안했다. 나는 노비들도 우리 집 식구로 여긴다. 식구들은 오늘 허드렛일이 많다며 놀이판 구경을 사양했다. 그래도 내가 억지로 끌고 갔어야 했다. 집안일쯤 뒤로 미뤄도 되는 건데…….
“미안하다. 우리끼리만 다녀와서.”
“별말씀을요, 아씨. 참, 어서들 들어가 보세요. 안방마님이 돌아오셨어요.”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말에 애련이가 호들갑을 떨며 반색했다.
“정말? 우와, 너무 좋다. 보고 싶어서 혼났는데!”
나도 티는 안 냈지만 마음속으로는 애련이만큼 기뻤다.
“흑, 흑흑…….”
그런데 안방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섬돌에 발을 디뎠다가 우뚝 멈춰 섰다.
“언니, 이거 어머니 울음소리 맞지?”
“그래.”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얼른 들어가자.”
애련이가 나를 제치고 대청으로 올라가려 했다. 나는 애련이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왜?”
애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애련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혹시 외할머니가 잘못되셨나? 아니야. 그랬다면 이레 만에 돌아오시지 못했을 거야.’
어머니가 내 혼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머니를 위로해야 했다. 이제 나도 혼인을 앞둔 어른이니까.
“아니야. 들어가자. 언니가 먼저 들어갈게.”
안방 문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스르르 다리가 풀렸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어머니, 저 애숙이에요. 애련이도 함께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그런데 안에서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애련이와 나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뒤 드르륵 안방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왔다. 애련이가 방 안을 기웃거리자 아버지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버지의 표정도 닫힌 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애련이가 조금 놀란 말투로 물었다.
“아버지, 안방에 계셨어요?”
“그래. 이제 사랑으로 건너가는 길이다. 어머니는 지금 몸이 편치 않으니, 나중에 오거라.”
“어머니가 편찮으세요?”
“심하진 않다. 아무튼 좀 쉬어야 하니, 물러가거라.”
그때 다시 안방 문이 드르륵 열렸다.
“어, 어머니!”
어머니가 언제 울었냐는 듯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래, 우리 딸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옷고름이 축 젖어 있었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셨구나!’
울지 않은 체하려는 어머니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혀끝을 꼭 깨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재빨리 어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응? 그, 그래. 다 나으셨다.”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우리 딸들, 어머니 보고 싶었지?”
어머니가 나와 애련이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어머니가 손을 잡아 주니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행동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곧고 바른 분이라 태연한 척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애련이가 이런 어색함을 놓칠 리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 집에 무슨 일 있죠? 어머니가 우신 거 다 알아요. 왜 우셨어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애련이는 아이를 다그치듯 쏘아붙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망부석처럼 딱 굳어 버렸다.
우연히 내 눈과 어머니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어머니가 슬그머니 애련이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내 손은 그대로 잡고 있었다. 이 알쏭달쏭한 상황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힐끔 애련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애련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왜 내 손은 놓고, 언니 손만 잡고 계세요?”
“응? 내, 내가 그랬느냐?”
그제야 어머니가 엉거주춤 내 손을 놓았다. 애련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언니……? 언니와 관계있는 일인가요? 그래요, 어머니? 어머니가 안 계시는 동안 언니가 한양에 다녀왔는데, 그 일과 상관있어요?”
어머니가 머뭇대자 아버지가 나섰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돌아가거라!”
아버지의 말투는 엄하고 단호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한 달 뒤면 나는 가족의 곁을 떠나야 했다. 한 달 뒤면 애련이도 알게 될 일, 차라리 지금 아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애련이도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말씀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버지의 한숨만이 정적을 갈랐다. 온 세상이 봄인데, 우리 집에만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 애련이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답답한 마음에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문을 한 뼘쯤 열었다. 봄밤의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열린 문틈으로 달려들어 왔다. 덕분에 답답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는지 하늘은 어두웠다. 마당도 어두웠다. 마당을 환히 비추던 진달래꽃마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에 방문 밖으로 후우 한숨을 내보냈다. 그때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누구지?’
덜컥 겁이 나서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내 방으로 오는 건가? 도둑이라면 이렇게 빨리 걷지는 않을 텐데…….’
문틈으로 내다볼까 용기를 내는 순간 발소리가 뚝 끊겼다. 나도 모르게 숨이 탁 멎었다.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섬돌을 밟고 올라섰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곧 내 방으로 들이닥칠 게 뻔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빤히 뜬 채 당할 수는 없었다.
“누구냐!”
나는 방문을 활짝 열면서 소리쳤다.
“엄마야!”
쿵, 엉덩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씨!”
귀에 익은 목소리, 애련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뒷간 갔다가 언니 보러 왔다. 근데 동생 잡을 셈이야?”
“쉿! 어머니 깨시겠다.”
애련이의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뒤 방으로 들였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매만져 반듯하게 펴 주었다. 내가 누우라고 손짓하자 애련이는 흥 콧방귀를 뀌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토라진 모습이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사근사근 애련이를 달랬다.
“화 풀어. 난 귀신인 줄 알고 소리 지른 거야.”
애련이가 등을 보이며 싹 돌아누웠다.
“아예 목검으로 내려치지 그랬어?”
“안 그래도 목검을 쓸까도 생각했었어. 미안.”
“얻어맞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네, 흥.”
“미안하다니까.”
“됐어. 내 잘못이지, 뭐. 내가 언니를 보고 싶어 한 게 잘못이야.”
“애련아…….”
나를 보고 싶었다는 애련이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애련이 쪽으로 돌아눕고는 애련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애련이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한참 뒤에 애련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는 미련한 곰이야. 멧돼지, 똥개야.”
“온갖 짐승이 다 나오네…….”
“간택 자리에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 근데 왜 멀쩡하게 간택을 치른 거야? 바보 흉내라도 내지! 입에 거품 물고 까무러치는 척이라도 좀 하지! 그러면 언니를 안 뽑았을 거 아냐!”
“……나도 그런 생각 안 해본 거 아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근데 왜 아무 짓도 안 했어?”
“모르겠어. 그냥……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었어.”
“어휴! 대단한 충신 나셨네.”
애련이가 어깨를 흔들어 내 손을 털어냈다. 나는 다시 애련이 어깨에 손을 얹을 수가 없었다. 등잔불만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만 자자꾸나.”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애련이는 대꾸가 없었다. 나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등잔불을 호오 불어 껐다. 어둠이 단숨에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곁에 애련이가 없었다. 애련이가 누워 있던 자리는 이불만 봉곳하게 솟아 있었다.
‘속이 무척 상한 모양이네, 휴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봉곳 솟은 이불을 가라앉혔다. 애련이와 함께 잤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아씨, 일어나셨어요?”
밖에서 종순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여니 햇살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니?”
“대감마님께서 서둘러 사랑으로 들라고 하셔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곧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갈 텐데, 왜 급히 날 보자고 하실까?
바삐 사랑채로 달려갔다. 사랑채 앞에서 차림새를 매만지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버지, 저 애숙이에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사랑채 문이 벌컥 열렸다. 몸소 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얼른 궁에 갈 채비를 하거라. 전하가 널 부르셨다.”
점심 무렵 종순이로부터 바깥마당에 임금이 보낸 가마가 이르렀다는 기별이 왔다. 나는 작은 보퉁이를 챙겨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버지 옆에서는 칠보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 있었다. 아버지는 칠보를 가장 든든하게 여겼다. 그래서 중요한 일로 외출할 때면 꼭 칠보를 데리고 다녔다.
‘오늘은 아버지가 함께 가 줄 모양이구나.’
아버지에게 고마웠다. 비록 자식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이지만.
신발을 신다가 무심코 종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종순이가 날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내가 왜 궁에 가는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곧 알게 될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종순이에게 말을 건넸다. 종순이뿐 아니라 오라버니들, 이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가마를 바깥마당으로 들인 건 나의 혼인 사실을 더는 숨기지 않겠다는 뜻일 테니까.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섬돌에 선 채 애련이의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방문이 꼭 닫혀 있었다. 애련아, 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부르지 않았다. 막상 애련이를 보면 인사말을 나누기가 어색할 것 같았다.
‘혹시 전하께서 기쁜 소식을 들려주면 좋으련만…….’
섬돌을 내려서면서 나는 내심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