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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송이 Oct 20. 2024

의순공주 이애숙 4

팩션 역사소설

4. 임금의 약속


  “고개를 들라.”

  처음 들어 보는 임금의 목소리였다. 무겁고 근엄할 줄 알았는데, 나긋하고 편안했다.

  “아닙니다, 전하. 어찌 감히 용안을 뵙겠습니까.”

  “괜찮다. 네 얼굴을 보며 얘기하고 싶구나.”

  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임금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듣던 대로 참 미인이구나. 갓난아기였던 네가 이렇게 크다니. 내가 청에 볼모로 끌려가기 전 널 본 적이 있다. 우리 형님도 널 보고 참 예쁜 아기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황송하옵나이다.”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 뭉클했다. 병자년 전란의 패배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조선의 두 왕자는 청에 볼모로 끌려갔다. 두 왕자는 비록 볼모의 신분이지만 왕자답게 꿋꿋하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644년 청의 황제 순치제는 명의 연경을 손에 넣은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풀어 주었다. 그래서 1645년 2월, 소현세자는 8년 동안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봉림대군은 청이 선양에서 연경으로 도성을 옮기는 일을 돕느라 청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형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은 봉림대군은 부랴부랴 짐을 싸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인조 임금은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649년, 봉림대군이 인조 임금의 뒤를 이어 조선의 왕(효종)이 되었다.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곧 지난해의 일이다.

  나는 임금의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금이 봉림대군이었던 시절에도 저런 눈빛을 지니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어쩐지 임금의 눈 속에 큰 꿈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임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내 얼굴에 밥풀이라도 묻었느냐? 왜 곰곰이 뜯어보느냐?”

  “아, 아니옵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임금이 허허 웃었다. 곧 웃음을 그친 임금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널 대전*에서 독대하자고 해서 많이 놀랐느냐?”

  “……조금 놀랐습니다.”

  “그래, 당연히 놀랐겠지. 그런데 어쩌지? 더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너를 수양딸로 삼으려 한다. 넌 조선의 공주가 되는 것이다.”

  귀를 의심했다. 수양딸, 공주.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말들이었다.

  “어찌 아무 말도 없느냐? 싫어서 그러느냐?”

  “아, 아니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좋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싫어도 할 수 없다. 임금의 명이니 기꺼이 받아들여라. 도르곤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네 충성심이 가상해서 주는 상이다.”

  “전하, 공주라니요. 제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너만큼 어울리는 인물이 어디 있겠느냐. 너의 봉작명은 ‘의순’이다. 옳을 ‘의’, 따를 ‘순’, 나라를 구하는 의로운 일에 순순히 따랐다는 뜻이다. 의순공주, 고맙고 또 고맙다.”

  의순공주. 이 이름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당장 벗어버리고 싶을 만큼.

  “왜 의순이라는 봉작명을 지으셨습니까?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인가요?”

  임금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임금과 오랫동안 눈을 맞추기가 겸연쩍어서 나는 슬며시 눈길을 굽혔다. 그제야 임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서다. 종실인 너를 청의 여인으로 만드는 것이.”

  임금의 목소리는 안개처럼 낮았다.

  “미안하시다니요. 어찌 저와 같은 어린 여인에게 그런 말씀을…….”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도르곤을 원망하지 말고 나를 원망해라.”

  “전하……!”

  “나는 비겁했다. 사실 도르곤은 조선의 공주와 혼인하기 원했어. 하지만 나는 내 딸을 오랑캐의 아내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주가 겨우 두 살이라고 거짓말을 했지. 그러자 도르곤은 종실이나 대신의 딸이라도 보내라고 하더구나.”

  임금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결국 나는 조선의 공주를 대신한 희생양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노여워하지 마라. 아니 노여워하거라. 날 평생 미워하거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전하, 차라리 평생 숨기시지 그러셨어요. 진실을 알면 제가 기뻐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임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임금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돌았다.

  ‘아버지는 도르곤이 공주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말씀을 안 하셨을까? 도르곤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조선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전하는 그에 대한 대비는 해두신 걸까? 아! 왜 자꾸만 이 나라가 날 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마음이 어수선해서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전하, 송구하지만 이제 저를 보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몸이 좀 불편합니다.”

  "어디가 불편하느냐? 너를 위해 어의를 불러 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그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저 집에서 편하게 눈 좀 붙이고 싶습니다."

  임금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 그만 일어나거라.”

  나는 일어나서 문까지 뒷걸음질로 다가갔다. 문 앞에 다다라 다시 한 번 임금에게 인사를 올렸다.

  “의순공주.”

  임금이 나를 ‘의순공주’라고 불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내 가슴에서는 북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나는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진실을 밝힌 것은 그래야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어. 옹졸한 나를 용서하려무나.”

  그 말에 나는 임금에게 대들고 싶어졌다.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십니까, 전하?”

  순간 임금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노려봤다. 나도 임금을 똑바로 쳐다봤다. 임금과 나 사이에 팽팽한 눈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음에 이를 만큼 불온한 일인 줄 알면서도 이 눈싸움을 피하기 싫었다.

  뜻밖에도 눈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갑자기 임금이 껄껄 웃는 바람에 싸움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임금은 눈빛을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그 정도 배짱이라면 걱정 없겠어. 청의 칙사가 사람 보는 눈이 있군 그래. 의순공주, 역사는 너를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기억할 것이야. 나도 너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길 것이다.”

  임금이 두 손으로 책상을 탁 내리쳤다.

  “이 자리에서 네게 약속하마. 언젠가는 내가 청을 치고, 너를 구하겠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청에 가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왕실과 조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하, 부디 힘없는 백성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소인, 그것이 청을 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임금의 얼굴을 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청을 치고 나를 구하겠다는 임금의 약속은 봄볕에 사라지는 눈처럼 쓸쓸하게 들렸다. 


*대전: 궁궐에서 임금이 지내는 궁전


  

  칠보가 대문을 열어 주는데, 어쩐지 집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마당에 큰오라버니와 작은오라버니가 나와 있었다. 일부러 아버지와 나를 마중 나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

  오라버니들이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휘적휘적 사랑채 쪽으로 걸어갔다.

  “너도 잘 다녀왔느냐?”

  잘 다녀왔느냐고 묻는 큰오라버니는 꼭 뭔가를 잘못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은 오라버니는 먼 하늘만 보고 있었고.

  ‘이제 식구들도 다 아는구나.’

  오라버니들의 낯설고 어색한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잘 다녀왔어요.”

  오라버니들은 내 대답을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쩐지 둘 다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이 오랑캐의 아내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미안함이겠지.’

  오라버니들의 속을 들여다본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내뱉었다.

  “오라버니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 자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는지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안마당은 바깥마당과 달리 소란스러웠다. 꼭 한 지붕 아래에 두 세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안마당에는 쌀과 비단이 수북이 쌓인 수레가 세 대나 들어와 있었고, 노비들이 수레와 곳간을 부지런히 오가며 짐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노비들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애련이도 게다가 칠보마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꽃이 다 져버린 매화나무 옆에서 아버지만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쌀과 비단은 다 뭐고요?”

  “전하께서 보낸 선물이다. 우리가 궁에 있던 사이에 보내셨단다.”

  “근데 왜 우리 식구는 아무도 없어요? 다 어디 갔어요?”

  “짐을 다 부리는 동안 모두 안마당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내가 일렀다. 오랑캐에게 딸을 주는 대가로 받은 선물을 어찌 식구들에게 보이겠느냐.”

  아버지는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치고는 다시 말했다.

  “쌀과 비단은 곳간에 쟁여 놓았다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베풀 것이다. 그리 알아라.”

  “아버지 뜻에 따를게요.”

 쌀과 비단에 고마운 마음도, 아까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직 청으로 떠나는 일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실감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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