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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송이 Oct 20. 2024

의순공주 이애숙 6

팩션 역사소설

6. 돈의 힘


  한양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압록강에 이르렀다. 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가마에서 내렸다. 먹구름 탓인지 압록강의 물빛은 흐린 하늘처럼 어두웠다. 

  나루터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배는 커다란 짐승처럼 보였다. 나는 그 배를 바라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이 강을 건너면 조선과는 이별이구나. 다시 올 날을 기약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

  배에 오르는데, 유모가 흑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수모의 눈에서도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대부분의 궁녀들이 고개를 숙인 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예경이는 애써 태연한 척 억지웃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에 내 눈에도 눈물이 새록새록 차올랐다. 나는 눈물을 쏟지 않으려고 혀끝을 꼭 깨물었다. 내가 울면, 이들의 작은 가슴이 갈가리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들의 삶은 소의 멍에처럼 나에게 매여 있었다. 내가 청에 묶여 있으면, 이들도 더불어 묶여 있어야 했다.

  배에 오른 나는 일부러 왕자처럼 의젓하게 앉았다. 나의 의연한 모습이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리라 생각했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배는 물살을 술술 가르며 나아갔다. 돛이 펄럭이는 소리가 경쾌해서 기분이 조금 산뜻해졌다.

  이물 쪽에 앉아 있던 오라버니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공주 마마,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나요?”

  내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안부를 묻는 큰오라버니에게 불쑥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제 눈엔 오라버니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올케 언니가 그리우신가 봐요?”

  “허허, 무슨 그런 농을.”

  “조금만 참으세요. 오라버니는 곧 조선으로 돌아가시잖아요. 작은오라버니도 마찬가지고.”

  그러자 작은오라버니가 힘주어 말했다.

  “공주 마마도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돌아오시게 만들 겁니다.”

  큰오라버니가 작은오라버니의 말에 힘을 실었다.

  “예, 공주 마마를 반드시 집으로 모셔올 겁니다.”

  “오라버니들 말씀만 들어도 기쁘네요. 고맙습니다.”

  내 반응이 조금 미지근했는지 큰오라버니가 한마디 덧붙였다.

  “공주 마마,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잠시 청의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청의 포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내 신세만 생각하느라 청의 포로들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병자년 전란으로 청의 포로가 된 사람은 오십만이 넘었다. 전란 중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고, 전란이 끝난 뒤 청나라로 돌아가는 청군에게 붙잡힌 사람도 있었다. 모래알같이 많은 포로들이 짐승처럼 질질 끌려와 이 압록강을 건넜다. 나뭇잎처럼 위태로운 뗏목을 타고. 포로들은 찢기고 해진 옷으로 칼바람을 견뎠고, 보릿가루 한 줌과 조밥 한 덩이로 칼바람보다 모진 굶주림을 잊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은 매정하게도 수많은 포로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포로들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였다. 돈,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조선 사람들은 포로가 된 가족과 친지를 구하기 위해 청나라까지 건너가 돈을 치러야 했다. 그나마 돈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포로의 값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돈이 부족한 사람은 가족을 눈앞에 두고 다시 조선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청나라로 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십삼 년이 흐른 지금, 이제 포로를 찾으려고 조선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람은 드물다. 청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다. 십삼 년이란 시간은 청의 포로들을 그냥 청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들을 잊지 말자. 내가 잘하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나는 조선인 포로를 되새기며 각오를 다졌다. 그때 툭, 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은 이윽고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큰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마, 일산 쪽으로 더 당겨 앉으세요.”

  “아닙니다. 오히려 일산을 걷어버리고 싶습니다. 비를 맞으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네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비를 맞았다. 모두들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비를 맞았다. 



  “공주 마마, 행차가 막 선양에 들어섰습니다.”

  가마 옆에서 나를 호송하던 작은오라버니가 선양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예, 오라버니.”

  한때는 청의 도성이었던 선양. 이곳에 오니 내가 청나라 땅에 있다는 게 한층 실감났다.

  ‘압록강을 건너고 육 일이 지났으니, 오늘로 한양을 떠난 지 스무하루째구나. 도르곤을 볼 날도 멀지 않았어.’

  바깥 풍경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마의 휘장을 걷게 하고, 창을 열었다. 

  행렬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선양의 풍경은 점점 화려해졌다. 단단한 벽돌집들이 곳곳에 우뚝우뚝 서 있었다. 저잣거리에는 천리경(망원경), 자명종, 안경 등 신기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청은 조선보다 앞서 있구나. 더 이상 오랑캐라고 얕잡아 봐서는 안 되겠어.’

  저 멀리 웅장한 저택이 나타났다. 신분이 높은 청나라 벼슬아치의 집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저택이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오라버니, 혹시 저기 보이는 저택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저도 궁금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큰오라버니는 모르시나요?”

  “저도 청은 처음이라…….”

  그때 가마꾼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윗분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송구합니다. 제가 조금 알고 있습니다만…….”

  “오, 그래!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게.”

  “소현세자 마마와 봉림대군 마마께서 지내셨던 세자관입니다. 심양관이라고도 하지요.”

  “세자관? 확실한가?”

  “예, 마마. 소인은 소현세자 마마께서 살아계실 때 청에 다녀간 적이 있사옵니다. 사신이었던 영의정 대감의 노복이었습지요.”

  “그, 그럼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마꾼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자관은 조금 더 멀어졌다. 그런데 아득히 멀어진 것만 같았다.

  ‘저 집이 소현세자 마마의 자취였다니! 그래서 쓸쓸해 보였구나.’

  청에 볼모로 끌려온 소현세자가 세자관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때 조선인 포로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자관에 찾아와 배고파 울부짖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해 마음 아파했다. 조선에도, 청나라에도 도움을 부르짖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조선은 배고픔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었고, 청은 의지가 없었다.

  그러자 세자빈이 나섰다. 세자빈은 배고픔의 해결책으로 무역을 생각해 냈다. 부자들은 많고, 물자는 부족한 청나라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세자빈은 조선에서 질 좋은 무명과 표범 가죽, 종이, 약재, 생강, 담배 따위를 들여왔다. 세자빈의 예상대로 청나라의 부자들은 이 물자들을 다투어 사갔다. 덕분에 세자관의 살림은 물론 조선인 포로의 살림도 펴질 수 있었다.

  세자빈의 능력을 알아본 청의 관리들은 세자관에 농사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청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그래서 늘 먹을 것이 부족했다. 청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세자빈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비록 청의 의도는 불순했지만, 세자빈은 청의 요구를 따랐다. 농사가 조선인 포로들에게도 도움을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자빈의 믿음은 이루어졌다. 하늘이 도왔는지 농사는 대풍이었고, 세자빈은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청나라 사람의 노비로 살고 있는 조선인 포로를 샀다. 그리고 세자관의 농부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남편인 소현세자는 세자빈의 성공에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아내를 도왔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인조 임금은 아니었다. 세자빈은 인조 임금에게 미움과 오해만 샀다.

  인조 임금은 세자빈이 돈을 버는 데 정신이 팔려서 아내의 할 일을 게을리 한다고 미워했다. 소현세자는 타고난 약골이었다. 약한 몸으로 늘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 앓아눕는 일이 잦았다. 임금은 세자빈이 아픈 남편을 보살피지 않아 소현세자의 건강이 더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미움보다 더 큰 문제는 오해였다. 인조 임금은 자신의 왕국 조선에서 청의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를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그날 이후 청이라면 이가 갈렸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니 청나라 사람에게 좋은 물건을 팔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농사를 짓는 며느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곱지 않은 시선은 아들에게도 향했다. 임금은 아내의 비뚤어진 행동을 바로잡지 않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소현세자는 그 무렵 청나라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끼고,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조선에 퍼뜨리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력에 분노했다. 청은 쳐서 무너뜨려야 할 적이지 배워야 할 스승이 아니었다. 조선의 임금에게는 그랬다. 

  결국 임금의 마음에서 오해가 싹트고, 오해는 걱정을 불러왔다. 청나라가 자신을 왕좌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아들을 앉히지는 않을까. 아들과 며느리가 청과 뜻을 모아 자신을 몰아내지 않을까. 임금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의 꼴이었다.

  마침내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다. 임금은 아들 내외를 결코 반길 수 없었다. 그들과 마주한 순간 자신의 왕좌에 대한 걱정만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졌다. 궁궐의 어의들이 약을 쓰고 침을 놓았지만, 소현세자는 쓰러진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새벽에 내렸다가 아침에 마르는 이슬처럼 허무한 죽음이었다.

  인조 임금이 소현세자를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정 대신들은 그 소문이 임금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하지만 임금은 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며느리를 없앨 궁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어버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이렇게 된 바에야 며느리마저 없애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때마침 후궁 조소용이 임금의 마음을 조종했다. 세자빈이 임금을 죽이려고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모함을 한 것이다. 그 말을 곧이 믿은 임금은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한 사발의 사약이 세자빈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현세자가 죽은 지 일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의 죽음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전란이 가져온 비극이라며 가슴을 쳤다.

  열두 살이었던 나에게도 그 일은 큰 충격이었다. 나는 임금에게 실망했다. 소현세자를 독살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를 떠나,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향한 임금의 마음은 옹졸하기 그지없었다. 임금에게서 내게 눈떡을 받아먹던 맘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백성들의 말처럼 다 전란이 가져온 비극이야.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할 텐데. 내가 세자빈 마마처럼 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멀어져 가는 세자관을 바라보며 세자빈의 업적을 되새겼다. 그러다 언뜻 봉림대군도 세자관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늘 조선을 마음에 품었던 봉림대군. 그는 병약한 형을 위해 종종 형의 임무를 대신했다. 청나라가 명나라와 연경을 놓고 싸울 때는 비록 청의 강요로 전투에 나섰지만 용감히 싸워 공을 세웠다. 연경을 차지한 황제가 상을 내리려고 하자, 봉림대군은 상 대신 조선인 포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볼모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재산의 대부분을 포로들에게 나눠 주었다. 

  조선의 참다운 왕자였던 봉림대군은 이제 조선의 왕이다. 그는 청을 무너뜨리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이 자리에서 네게 약속하겠다. 언젠가는 내가 청을 치고, 너를 구하겠다.”

  임금의 약속이 메아리처럼 귓속을 울렸다.



  선양 행궁은 세자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세자관을 지날 무렵 하늘 높이 떠 있던 해는 아직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양을 벗어나면 마땅히 머물 곳이 없기에 행차를 멈추고 행궁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고 했다.

  행궁의 정문인 대청문 앞에서 가마가 멈추었다. 가마꾼들에게 가마가 멈춘 까닭을 물으려는데, 호행사가 가마로 다가왔다.

  “마마, 가마를 타고 행궁에 들어갈 수 없답니다. 말이 준비되어 있으니, 말에 오르십시오.”

  “그래야만 하는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청의 법도랍니다. 본래 이곳은 황제가 살았던 황궁이지 않습니까? 황궁에서는 황제 외에는 아무도 가마를 탈 수 없답니다. 이 행궁은 지금 황제의 별장으로 쓰이지만 황궁과 똑같이 법을 적용한다는군요.”

  청나라에 왔으니 청의 법도를 따르는 게 당연했다. 내가 가마에서 내리자 호행사가 내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공주 마마,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황제가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던 시절에는 선양 땅 어디에서든 가마를 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청의 조정이 연경으로 옮겨 가면서 금지를 풀었다는군요. 지금은 이 행궁만 제외하고는 누구나 선양에서 가마를 탈 수 있답니다.”

  “그래서 황제에게 감사하란 뜻이오? 행궁 앞까지 가마를 타고 올 수 있게 해 주신 걸?”

  “예? 그, 그런 게 아니오라…….”

  호행사가 얼굴을 붉히며 쩔쩔맸다. 나는 호행사가 조선의 관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 속에는 분명 황제의 은덕에 감사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가 비굴한 마음을 갖는 것도, 그 마음을 내게 표현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나는 호행사에게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어서 말을 대령하시오. 궁으로 들어가야겠소.” 



   황비의 침전이었던 탓일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 잠들 수가 없었다. 

  황비의 침전으로 쓰인 청녕궁을 침소로 마련해준 건 엄청난 특별 대우다. 그만큼 도르곤의 권력이 세다는 증거다. 나는 이렇게 강한 권력을 지닌 도르곤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물론 전에도 궁금함을 품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무엇을 바라며 사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도르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의 지위, 그리고 나보다 스물세 살 많은 서른아홉 살이라는 것뿐이다.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아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공주 마마, 어찌 주무시지 않고 나오셨습니까?”

  방을 지키고 있던 예경이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뜰에서 밤바람 좀 쐬려고 그런다. 걱정 마라.”

  “제가 모실까요?”

  “아니다. 혼자 있고 싶구나.”

  별들이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청녕궁의 관문인 봉황루가 별빛을 받아 한결 아름답게 빛났다. 거대한 삼층 누각인 봉황루는 황금빛 유리 기와와 녹빛 테두리로 꾸민 지붕 덕분에 웅장함보다는 아름다움이 먼저 다가왔다. 청을 세운 황제 누르하치는 이 궁궐을 짓고 황궁으로 삼았다. 그가 봉황루 삼층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며 달을 바라보곤 했다는 이야기가 조선에도 전해진다.

  새삼 누르하치가 봉황루 꼭대기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때 이미 조선을 집어삼킬 꿈을 품고 있었을까?’

  실제로 조선을 집어삼킨 주인공은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인 홍타이지다. 그는 청의 두 번째 황제 태종이다.

  나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봉황루 삼층 누각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조선을 무너뜨릴 꿈에 부푼 채 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노가 치솟았다. 아름다운 봉황루를 와르르 무너뜨리고 싶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박석으로 꾸민 청녕궁 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돌을 밟는 느낌이 산뜻했다. 그런데 왼쪽 한 켠의 솟대에서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거기 누구냐?”

  그림자가 멈칫하더니 곧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자객이냐? 나를 해치려거든 비겁하게 숨지 마라!”

  “송구합니다, 공주 마마. 소인 청녕궁을 지키는 궁녀이옵니다.”

  낮에 본 궁녀였다. 초승달처럼 예쁜 눈썹을 갖고 있어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본래 이 시간에 종종 밖에 나오는가?”

  “예.”

  “자네, 조선 사람이구만.”

  “그렇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 땅에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궁녀가 조선에 돌아가지 못한 청의 포로라는 것을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별 구경하러 나왔는가?”

  굳이 궁녀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예. 이곳 하늘은 고향의 하늘과 많이 닮았습니다.”

  “고향이 어딘가?”

  “의주입니다.”

  “그리 멀지는 않구나.”

  나는 말을 뱉으면서 아차 싶었다. 이곳에서 의주가 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궁녀에게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질 터였다.

  “미안하네. 내가 말실수를 했네.”

  내가 사과하자 궁녀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궁녀는 넌지시 하늘로 눈길을 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마, 노비 시장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청은 노비 시장을 열어 공개적으로 조선 포로를 팔아넘겼었다. 

  “벌써 십삼 년 전 일이네요. 저도 노비 시장에 끌려갔었지요. 저는 그때 궁녀가 아닌, 청나라 하급 관리의 시녀였습니다. 제 지아비는 의주 작은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노비 시장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청으로 달려왔지요. 은 이백 냥을 준비해서. 하지만 헛걸음만 하고 말았습니다. 제 주인은 은 오백 냥을 요구했거든요.”

  “청나라 사람들이 마음대로 돈을 올려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사실 속가를 올린 것은 조선의 대신들입니다. 처음에는 은 사십오 냥 정도면 속이 가능했어요. 그런데 대신들이 지레 겁을 먹고 은을 일천 냥씩 턱턱 내놓는 바람에 속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지요.”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 포로 중에는 조선 관리의 피붙이도 있었다. 이들은 절차와 질서를 무시하고 몰래 뒷거래를 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청나라 사람들은 저마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속가를 마구 올리게 되었다.

  “남편은 그냥 의주로 돌아갔는가?”

  “그렇습니다. 돈을 구해서 다시 온다고 약속했지만, 오지 않았어요. 돈을 못 구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두 달 뒤 저는 운 좋게 궁궐 내시의 눈에 띄어 궁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네. 혹시 지금이라도 돈만 마련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는가?”

  그러자 궁녀는 슬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는 뜻인가?”

  “예. 환향녀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환향녀란 ‘고향에 돌아온 여자’란 뜻이다. 청의 포로였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겉은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조선은 고향에 돌아온 여자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청나라 사람에게 정절을 바친 배신자라며 외면했다. 실제로 정절을 바치지 않았더라도 믿어 주지 않았다. 남편들은 돌아온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강제로 내쫓았다. 버림받은 여자들 중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환향녀를 버리는 데 앞장선 장본인은 조선의 사대부였다. 이들은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나는 환향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궁녀에게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따뜻이 안아 주고 싶었다. 

  “자네 지금 나이가 몇인가?”

  “스물아홉입니다.”

  “나보다 한참 위구만. 외람된 말이지만, 한 번 안아 주고 싶네. 그래도 괜찮겠는가?”

  “예? 공주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역시 내가 좀 지나쳤지? 미안하네.”

  “아, 아니옵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당황한 것입니다. 제가 어찌 공주 마마께 안길 수 있겠습니까?”

  “본래 내가 나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네. 이해하게.”

  궁녀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 미소에 밝은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대답 대신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썩 나오너라!”

  “마마, 저 예경이에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예경이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송구합니다. 공주 마마가 걱정돼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 감정이 북받쳐서…….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용서하세요.”  

  “호호. 내가 용서 못한다면 어쩌겠느냐? 내 얼굴을 할퀴기라도 할 테냐?”

  내가 농을 던지자 예경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마, 참으로 짓궂으십니다. 어찌 그런 농을…….”

  예경이는 눈으로는 울고 입으로는 웃었다. 나는 예경이가 눈물을 거두기를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저 솟대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은 무엇인가? 꼭 밥그릇 같은데…….”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솟대를 가리키며 궁녀에게 물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밥그릇입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누구의 밥그릇인가?”

  “까마귀 밥그릇입니다. 청국 사람들은 까마귀를 길조로 여깁니다. 그래서 까마귀가 날아오라고 밥그릇을 놓은 것입니다.” 

  조선은 까치가 길조인데, 청은 까마귀가 길조라니. 기분이 묘했다. 이렇듯 청과 조선은 서로 달라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어렴풋이 희망도 움텄다. 까마귀밥을 챙기는 너그러움이 청나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 희망적이었다. 

  ‘그 너그러움을 펑펑 샘솟게 할 수만 있다면, 조선에도 평화가 찾아올 텐데.’

  나는 솟대에 걸린 까마귀 밥그릇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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