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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송이 Oct 24. 2024

의순공주 이애숙 8

팩션 역사소설

8. 생애 첫 격검


  “마마, 전하께서 아시면 소녀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 그 말씀 거두어 주세요.”

  예경이가 이별하는 연인을 붙잡듯 발을 동동 굴렀다.

  “걱정 말거라.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자꾸 숲속으로 들어가신다 하니 말리는 거지요. 여기 당나무 아래 얼마나 시원하고 좋아요. 제가 일행들과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다른 사람 발길도 막구요.”

  “그건 민폐다. 숲의 기운 좀 받고 싶어서 그러니, 마음 놓으려무나.”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예경이는 한숨을 폭 쉬고는 길을 터주었다.

  산기슭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무가 울창한 숲의 속살로 들어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숲의 모습은 청과 조선이 별반, 아니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문득 낙원은 다 똑같은 모습이 아닐까, 이런 숲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굴참나무 우거진 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잔잔히 일렁였다. 평화로웠다. 그러나 조선의 평화를 무너뜨린 청에서 맛보는 평화는 금세 죄책감을 불러왔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피하시오!”   

  급박한 소리와 함께 길이 아닌 산비탈에서 한 사내가 달려내려왔다. 지게를 지고 있는 걸 보니 나무꾼인 모양이었다. 나무꾼 뒤를 커다란 승냥이 한 마리가 쫓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목검을 빼들고 승냥이 주위를 살폈다. 승냥이는 떼를 지어 사냥하는 습성이 있기에 여러 마리가 달려든다면 위험천만이었다. 다행히 다른 승냥이는 보이지 않았다. 무리에서 이탈한 녀석인 모양이었다.

  “달아나요!”

  나무꾼이 다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돌을 주워 승냥이에게 던졌다. 승냥이의 목표물이 나로 바뀌었다. 사내는 승냥이의 사정권에서 벗어났고, 승냥이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목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와라. 피하지 않을 테니!’

  코앞까지 달려온 승냥이가 훌쩍 뛰어올랐다. 뾰족한 엄니가 뚜렷이 보였다. 그 순간 본능적으로 팔이 움직였다. 목검이 승냥이의 대가리를 정확히 때렸다. 깨갱 소리와 함께 사나운 짐승은 나가떨어졌다. 나는 한 번 더 내려치려다가 멈칫했다. 한 방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섰다. 숲속을 보금자리로 삼고 사는 짐승에게 굳이 치명상을 입힐 필요는 없었다. 

  승냥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목검을 겨눈 채 승냥이의 눈과 맞섰다. 승냥이는 승산이 없다 판단했는지 슬슬 뒷걸음질 치다 다시 비탈을 향해 달려갔다.

  ‘널 해할 마음은 없었어. 사람을 지키려 했을 뿐. 부디 무리를 만나 잘 지내거라.’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승냥이에게 나는 행운을 빌어 주었다.     



  “정말 다친 데는 없는 거요?”

  “거듭 말씀드렸잖습니까. 말짱하다고.”

  “허어, 왕후가 이리도 담대한 여인이었다니, 대단하오!”

  도르곤이 짝짝 박수를 쳤다. 이어서 맨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시늉까지 했다. 나는 괜히 겸연쩍어 슬며시 눈길을 피했다. 

  목검으로 승냥이를 쫓아 나무꾼을 구한 일이 결국 도르곤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내 의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낀 나무꾼이 궁의 수비대에게 그 소식을 전한 것이다. 나는 혼자 움직이고 위험까지 초래한 것에 도르곤이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도르곤은 화통하게 웃어젖혔다. 칭찬까지 퍼부었고, 걱정은 덤이었다.

  “굳이 제 흉내까지 내실 건……. 부끄럽습니다.”

  “하하, 부끄럽긴요. 왕후가 자랑스러워 그러는 건데.”

  “송구합니다.”

  “그런데 검술은 언제 익힌 거요? 여인인 건 둘째 치고, 조선에선 검술을 중시하지 않는다던데.”

  도르곤은 진심으로 궁금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싯적에 큰오라버니에게 배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조선에선 검술보다는 창술과 궁술을 더 중시하지요. 하여 무과 시험에서도 창술과 궁술만 있고, 검술은 없습니다.”

  “그걸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제 아버지도 그런 목소리를 낸 사람 중 한 분입니다. 큰오라버니도 아버지와 뜻을 같이했구요.”

  “오호! 그럼 아버지가 검술 배우기를 장려하신 거요?”

  “그게…… 장려하신 것까진 아니고, 제가 수련하는 걸 허락해주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딸자식이다 보니…….”

  “그렇군요. 아무튼 승냥이 대가리를 정확히 내려치다니, 큰오라버니에게 배웠다 해도 수련은 거의 혼자 했을 텐데, 참으로 대단하오.”

  나는 쑥스러워 그저 미소만 지었다. 도르곤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언젠가 내 직접 왕후의 솜씨를 확인하고 싶소.”

  그 순간 누르고 있던 욕망이 울컥 차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르르 봉인이 풀리고 말았다.

  “확인시켜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르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전하께서 격검 대회를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저도 출전하게 해주십시오.”

  도르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격검!”

  심판의 외침과 함께 상대와 나는 목검을 서로에게 겨누었다. 허리에 백띠를 두른 그와 청띠를 두른 내가 한 발짝 한 발짝 마주 보며 다가갔다. 나는 그의, 그는 나의 허점을 찾으며. 주위는 고요했다. 사내와 여인의 격검, 난생처음 보는 희귀한 광경에 모두 숨을 죽였다.

  상대인 사내는 이여중, 갓 입대한 십오 세 소년이라고 했다. 도르곤의 사병 중 가장 나이 어린 병사였고, 내 생애 본격적인 첫 격검 상대였다. 우리의 대결은 격검 대회와는 상관없는, 볼거리를 위한 특별 격검이었다. 도르곤은 자신의 격검 대회에 내가 출전하는 것을 반대했다. 내가 한 명이라도 이길 경우 자칫 군대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는 도르곤의 우려를 받아들였고, 그는 대안을 제시했다. 공식 출전자가 아닌 신참 병사와 특별 대결을 벌이라는.

  그 특별한 상대가 슬쩍 복면을 고쳐 썼다. 그는 나와의 대결 조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내걸었다. 사내로서 여인을 이길 경우 얻을 게 없고, 질 경우 많은 것을 잃을 수 있기에 얼굴을 가리고 싶다고 했다. 도르곤은 그 어린 사내의 심정을 헤아려 주었다. 

  얼굴을 모르는 이여중이 선제공격을 가했다. 나는 정수리를 노린 칼날을 가뿐하게 받아냈다. 하지만 손목이 찡 울릴 만큼 사내의 힘이 느껴졌다. 두 번째 공격은 옆구리였다. 나는 이번에도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칼날을 밀어내며 아래에서 위로 베었다. 사내는 날렵하게 몸을 젖혀 내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대결은 길어졌다. 두 목검이 쉴 새 없이 부딪쳤고, 조용하던 군중 속에선 번번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탄성은 내 투지를 뜨겁게 불태웠다. 그러나 내 몸은 점점 지쳐갔다. 사내의 공격을 받아낼수록 힘이 빠졌고, 내 공격은 갈수록 맥이 풀려갔다.

  ‘이대론 승산이 없어.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걸 걸자.’

  나는 일부러 몇 걸음 물러서서 시간을 벌었다. 상대는 내 작전을 읽으려는지 잠시 공격을 멈췄다. 나는 그 사이 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목검을 쥔 손에 힘을 꼭 쥐었다.

  “합!”

  기합과 함께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속도에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상대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회심의 일격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상대가 재빨리 몸을 틀며 피해낸 것이다. 너무 힘을 실은 나머지 나는 균형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비틀거리는 내 옆구리에 상대의 목검이 꽂혔다. 나는 헉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백띠 승!”

  심판의 판정과 함께 박수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승자 이여중을 향한 축하였다.

  나는 일어서려다 옆구리를 만지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승자가 내게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여중이 손을 내밀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설핏 스쳐갔다. 나는 잡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여중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로 했다. 승자를 인정해 주는 행동이라, 여인도 배포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손길에서 호의가 느껴진 때문이기도 했다.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이여중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여중이 눈을 가늘게 뜨려고 애쓴다는 느낌이 설핏 스쳐갔다. 그 느낌의 의미를 헤아릴 새도 없이 다른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하지.”

  다른 손의 주인공은 남편 도르곤이었다. 놀란 이여중은 도르곤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왕후님께 불경한 행동을 했습니다.”

  도르곤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일어나라. 넌 격검의 승자로서 아량을 베푼 것뿐이다.”

  도르곤은 말을 마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뒤미처 이여중이 따라 일어났다. 도르곤이 이여중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솔직히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도르곤, 당신은 조선에게는 잔인한 적의 장수이지만, 통이 큰 사내인 것만은 분명하군요.’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도르곤은 내 마음속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보냈다. 하늘의 해가 그의 얼굴을 비췄다.

  도르곤이 햇빛 어린 얼굴로 내게 말했다.

  “왕후, 당신의 검술 솜씨에 경의를 표하오. 멋진 격검을 보여 주어 고맙소.”

  그의 칭찬에선 진심의 향기가 났다. 나는 고개 숙여 남편이자 섭정왕에게 감사를 표했다. 진심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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