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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송이 Oct 20. 2024

의순공주 이애숙 7

팩션 역사소설

7. 섭정왕의 아내


  5월 20일, 해저물녘 진황도에 이르렀다. 

  진황도의 작은 관아에 여장을 풀고, 민가에서 얻어 온 돼지를 잡아 다들 배불리 먹었다. 밥을 먹고 난 뒤 금세 어둠이 내렸다.

  방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데, 투둑투둑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머리 만지기를 멈추고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다. 애련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조선을 떠나기 전 잠깐 얼굴만 보았던 애진 언니도 그리웠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가족들의 얼굴을 지웠다.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했다. 옛 생각을 하면 자꾸만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그러면 발전할 수 없었다.

  예경이를 방에 들여 이야기나 나눌까 하는데, 마침 예경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 마마, 역관 정명수가 뵙기를 청합니다.”

  이 시각에 웬일일까?

  “들라 이르라.”

  정명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청의 칙사도 함께였다.

  “공주 마마, 뭐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용건이나 말하거라. 이 밤에 웬일이냐?”

  정명수가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급히 구왕 전하의 전갈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칙사와 함께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서 말해 보거라.”

  “전하께서는 마마의 행차가 예상보다 늦어져서 애를 태우고 계십니다. 하여 내일 산해관으로 마중을 나오신답니다. 오시에 뵙자고 하시더군요. 시간에 맞춰 가려면 내일 조금 일찍 길을 떠나야 합니다. 묘시쯤 출발해야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괜찮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전하께서는 내일 마마를 뵙는 자리에서 바로 혼례를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혼례 준비는 다 해 오신다고.”

  “혼례를?”

  “예. 산해관에서 혼례를 치르신 뒤 연경으로 모셔간다고 합니다.”

  조금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행차가 더디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혼례를 치렀을 터였다.

  “알겠다. 전할 말이 더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 얘기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거라.”

  나는 일부러 청의 칙사가 함께 온 까닭을 묻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나를 얕잡아 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청의 칙사라도 지금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일 뿐이다. 나는 그에게 용건이 없었다.

  “예?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황한 정명수가 청나라 말로 칙사에게 알 수 없는 말을 건넸다. 이야기를 들은 칙사는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왕비 간택이 있던 그날, 나를 보고 웃었던 것처럼.

  정명수와 칙사는 잠깐 둘만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끝나자 정명수가 내게 말했다.

  “태보 대감의 말을 그대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그리 하여라.”

  “공주 마마는 곧 대국 청의 왕후가 되십니다. 구왕 전하와의 혼인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신하의 나라 조선과 임금의 나라 청의 결합입니다. 마마의 행실이 조선에 햇볕을 내릴 수도, 비를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나는 칙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칙사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칙사와 눈을 맞춘 채 정명수에게 말했다.

  “태보 대감께 아뢰어라. 나는 대답을 드렸다고.”

  정명수가 어리둥절해하더니, 칙사에게 우물쭈물 내 말을 전했다. 그러자 칙사가 조선말로 내게 말했다.

  “대답 잘 들었습니다.” 



  5월 21일, 아침에 보슬비가 잠깐 내렸다. 그런데 수행원들은 장대비라도 맞은 것처럼 허둥지둥댔다. 나의 갑작스러운 혼례 소식에 마음이 바빠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준비할 것 없다고 일렀지만, 수행원들은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안절부절못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요.”

  “마마,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두 오라버니들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걱정들 마세요. 저는 조선의 공주, 의순공주입니다. 이 이름에 걸맞게 처신할 거예요.”

  오히려 내가 오라버니들을 안심시켰다. 

  마음을 굳게 먹고 가마에 올랐다. 곧 하늘이 개고 햇살이 반짝였다.

  가마는 시간에 맞춰 산해관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자 우뚝 솟은 산해관성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벽돌로 쌓은 성벽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제아무리 강한 태풍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결국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되었구나.’

  산해관성은 장성(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이다. 동쪽을 기준으로 삼으면 장성의 시작점이고, 서쪽을 기준으로 삼으면 장성의 끝점이다. 장성은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천칠백여 년에 걸쳐 쌓은 성이다. 성벽의 길이가 만 리가 넘는 어마어마한 장성은 중국의 상징이다. 장성의 주인은 곧 중국의 주인이다.

  나는 도르곤이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성의 성문을 지나 연경으로 진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산해관성은 연경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이 성을 통과한 도르곤의 청군은 마침내 연경을 무너뜨렸다.

  ‘연경으로 말을 달릴 때 혹시 무섭지는 않았을까?’

  언뜻 도르곤도 겁을 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마마, 깊은 생각에 잠기신 듯한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예경이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다. 걱정은 무슨.”

  그때 말발굽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 성벽 너머에서 대군이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 수행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경이가 겁에 질려 물었다.

  “혹시 전란이라도 난 걸까요?”

  “아니다. 아무래도 구왕이 오는 모양이다. 지금 청을 넘볼 수 있는 무리는 없으니, 안심하거라.”

  “그런데 말발굽 소리가……. 족히 천 마리는 넘을 것 같습니다.”

  “침착해라.”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군이 근처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일 때 성문 앞에 말을 탄 청의 장수가 나타났다. 나는 그가 도르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도르곤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순박한 소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칼로 닭의 모가지조차 내리치지 못할 만큼 순해 보였다

  “구왕 전하이시오. 모두 예를 올리시오!”

  정명수의 외침에 모두들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나는 꼿꼿이 선 채 도르곤을 바라보았다. 도르곤의 눈길이 나에게 향했다. 표정이 깊은 연못처럼 담담해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불현듯 마음속에서 증오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저 순한 얼굴 뒤에 잔인한 살인마의 얼굴을 감추고 있겠지? 조선의 백성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도르곤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은 마음이 거세게 일었다. 도르곤이 당장 눈을 뜨라며 불호령을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침묵했다. 내 속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몰래 폭 한숨을 쉰 뒤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내가 지금 여기 온 목적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반짝, 눈을 뜨고 도르곤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의순공주이옵니다.”

  도르곤이 조선말로 나직하게 답했다.

  “환영하오.”

  나는 산해관성의 동문 성루인 ‘천하제일관’으로 올라갔다. 신랑 예복을 갖춰 입은 도르곤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 미소에 답하지 않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북쪽으로는 푸르른 연산과 그 연산의 등줄기를 타고 장성이 한없이 뻗어 있었다.

  남쪽으로는 바다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산해관성 둘레는 도르곤의 육만 기병이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여기였다. 나는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도르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거짓 미소를 띄워 보냈다.

  “혼례를 시작하라!”

  내 미소를 받은 도르곤이 조선말로 우렁차게 외쳤다. 육만 기병이 산해관성을 무너뜨리려는 듯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초야(初夜)를 누추한 곳에서 맞이하게 해 미안하오. 오늘 연경까지 가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랬소.”

  도르곤의 조선말 말본새는 제법 정갈했다. 물론 어눌한 구석도 있지만 조선 사람과 견주어도 큰 차이점은 없었다.

  “조선말을 참 잘하십니다. 언제 그렇게 익히셨는지요?”  

  도르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조선의 공주를 아내로 삼겠다고 작정한 뒤부터 부지런히 공부했소. 아내와 말이 잘 통해야 부부 사이가 돈독해지는 법이니.”

  도르곤은 미소와 함께 말을 마쳤다. 나는 불쑥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졌다.

  ‘조선을 수월하게 강탈하기 위해 익힌 건 아닙니까?’

  하지만 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법이므로.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내 당돌한 물음에 도르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초야에 신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신부가 또 있을까요? 하하.”

  “전하와 저는 평범한 신랑 신부가 아니기에 드린 질문입니다.”

  도르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맘에 안 들어하면 조선에 화가 미칠까 봐 걱정하고 있나 보오.”

  “제 마음 숨기지 않겠습니다. 전하의 짐작이 맞습니다.”

  별안간 도르곤이 껄껄 웃었다. 그 웃음에서 장부의 기개가 느껴졌다.

  “그런 걱정은 내일 해도 늦지 않소. 오늘은 그저 즐깁시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을.”

  도르곤은 말을 마치자마자 주안상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술병을 들어 술잔을 가득 채웠다. 맑은 술이 찰랑이는 술잔이 곧 내게 넘어왔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술잔을 건네받았다. 조선에서 초야의 신부는 보통 술잔을 살짝 입에 대기만 할 뿐 넙죽 받아 마시지는 않는다. 자칫 신랑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도르곤이 보는 앞에서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스스로를 담금질하기 위한, 나름의 의식이었다. 

  술이 목을 넘어갈 때 울음이 울컥 넘어왔다. 한 번 더 꾹 술을 삼키고 재빨리 혀끝을 깨물었다.

  “고맙소.”

  도르곤이 나직이 한마디 건넸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로 다가왔다. 무엇이 고맙냐고 세세히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단지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외쳤다.

  ‘오늘밤 신부의 도리를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처럼 즐기지는 못하겠습니다.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도르곤은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속마음을 읽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이윽고 도르곤이 미소를 입에 문 채 말했다.

  “그만 잠자리에 듭시다.”

  “뜻대로 하십시오.”

  이제는 신랑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도르곤의 손이 내 족두리를 벗겼다. 나는 족두리를 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생각하고 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신부의 돌발 행동에 신랑은 움찔했다. 하지만 역시 도르곤은 소인배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다음 행동을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이 손, 부디 아름다운 일에 쓰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도르곤의 손을 놓았다. 도르곤은 그저 부드럽게 한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족두리를 한 켠에 내려놓았다.

  “이제 불을 끄겠소.”

  도르곤은 몸을 비틀어 앉고는 도포 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켜 촛불을 껐다.* 한순간에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찼고, 나는 어둠 속에서 빌었다.

  ‘조선에 복이 가득하기를!’

  도르곤, 나의 신랑이 어둠 속에서 내 옷고름을 풀었다.


*초를 입으로 불어 끄면 복이 달아난다고 해서 옷깃으로 바람을 일으켜 끄는 풍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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