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9. 백성의 등불
부모님 전 상서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신지요. 어제 아버지의 서찰을 받고 무척 기뻤습니다. 하오나 서찰 속에는 온통 두 분의 걱정만 가득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걱정만 끼쳐 드리는 딸인 모양이에요.
남편이 죽은 사실은 끝까지 숨기고 싶었습니다. 물론 숨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어요. 도르곤의 사망은 청의 역사에 기록될 만큼 큰 사건이니까요. 당연히 조선에도 알려질 테고, 머지않아 부모님 귀에도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알게 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혼인한 지 일곱 달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날 줄 정말 몰랐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변을 당하다니……. 동행한 수하들 말로는 멧돼지를 쫓아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고 하더군요. 용맹하고 민첩한 남편이지만 미처 손 쓸 새가 없었던 듯합니다.
저는 남편을 미워했어요. 조선을 짓밟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게 만든 사람이니 미워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도르곤을 지아비로서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마치 광대처럼 연극을 했지만, 아내로서 본분을 다했지요.
그 사람은 제 정성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지요.
혼례를 올리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차를 마시다가 남편이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당신은 백송골이오.”
“백송골이라니오?”
“흰 빛깔의 매, 조선 최고의 매 백송골을 모르시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저를 백송골에 비유하시는지…….”
“하하, 그냥 넘어갑시다. 남사스러워서 더는 말 못하겠소.”
자태가 매우 아름다운 미인을 백송골에 빗대어 표현하잖아요. 제가 뛰어난 미인이 아닌데도 남편은 그런 칭찬까지 하더군요. 그동안 제가 거짓으로 남편을 대한 게 미안해질 정도였어요. 아무튼 듣기에는 좋았습니다. 남편이 조선말을 잘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산해관에서 혼례를 올리고 연경에 갔을 때, 남편은 호행사 원두표에게 돌연 제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전혀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던 사람이 느닷없이 그런 감정을 표현하니 모두 놀랐지요. 저 역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요.
나중에야 남편은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조선이 기고만장해질까 봐 일부러 트집을 잡은 것이라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역시 도르곤은 철저한 인물이고, 청국을 휘어잡을 만한 재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조선에 태평이 찾아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그릇된 것인가요? 조선의 여인으로서, 또 조선의 공주로서 조선의 숨통을 쥐고 있는 사람에 대해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요? 솔직히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죄책감에 잠 못 이루곤 했습니다. 어찌 됐든 나의 지아비인데, 지어미로서 불순한 마음을 먹었기에 그가 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죄책감을 갖는 것은 조선을 배신하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도르곤의 죽음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뛸 듯이 기쁜 일이잖아요.
남편은 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이 센 사람일수록 그만큼 반대 세력도 많은 법이라는 것을 남편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남편은 죽은 뒤에 역적이라는 누명을 썼거든요.
정적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멀게 했습니다. 그들은 남편이 틈만 나면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역모를 꾸몄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열세 살의 황제 순치제는 역시 어렸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정적들의 모함에 넘어가더군요. 순치제는 제 남편인, 자신에게는 숙부인 도르곤을 부관참시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정적들은 부관참시 자리에 저도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역적의 죄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주려는 의도였지요. 순치제가 날 가엾게 여겼는지 그것만은 막아 주더군요.
사실 역적은 남편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저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내심 남편이 황제가 되기를 바랐거든요. 결코 제가 황비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은 아닙니다.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황제의 권력과 황비의 권력이 탐이 났습니다. 그 권력을 조선과 조선 백성을 위해 쓰고 싶었습니다.
청나라 땅도 살 만은 했습니다. 오랑캐의 땅이지만 조선 땅과 다를 게 없었어요. 여름에는 뜸북뜸북 뜸부기가 울고, 가을에는 새록새록 구절초가 피더군요. 또 연경은 한양보다도 더 발전하여 생활하기도 편했지요. 그래, 겨울도 지낼 만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에서 처음 맞이한 겨울에 남편을 잃을 줄은…….
겨울은 모질고 매서웠습니다. 저는 섭정왕의 왕후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의 아내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청에서 역적의 가족은 모두 죽이거나 누군가의 노비로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을 뿌리째 뽑아버리지요. 조선이 역적을 다스리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남편을 부관참시한 다음 날, 황제가 저를 불렀습니다.
“역적 도르곤의 아내는 지금부터 백양왕의 아들 보로를 남편으로 섬겨라!”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새 남편을 맞으라니요. 이것이 대국 청의 법도입니까?”
“숙부의 공적을 생각해서 네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이고, 또 네가 조선의 공주이기에 노비로 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죽여 달라고?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나!”
어린 황제는 노발대발했습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이대로 목숨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뜻을 따를 것인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황제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해서도 결코 아닙니다. 제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에 온 이유는 조선의 백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면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황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내 명을 거역하는 자는 죽음뿐이다. 그걸 원하느냐?”
저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습니다.
“보, 보로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서찰을 받아보기 사흘 전, 저는 보로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혼례 치르는 날,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습니다. 도르곤과 혼례를 하던 날이 떠오르더군요. 5월, 햇살이 참 밝았었지요. 비가 갠 뒤라 하늘은 더 없이 맑았고요. 그래서 남몰래 희망을 꿈꾸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보로의 아내가 되던 날에도 흰 눈을 보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희망이 나를 두 번이나 저버리지는 않겠지요?
보로는 조선말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간단한 청나라말 몇 마디밖에 익히지 못했고요. 그래서 참 답답합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 수 없어서 더욱 답답합니다. 물론 같이 산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으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요.
애련이는 잘 지내나요? 부모님 말씀은 잘 듣나요?
애련이에게 저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아, 애련이도 도르곤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알고 있다면 할 수 없지만, 몰랐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로와 혼인한 것도 숨겨 주세요. 마음이 여린 녀석이라 큰 충격을 받을 거예요.
오라버니들도 건강하겠지요? 오라버니들에겐 고맙다는 말을 수백 번 해도 모자라요. 연경까지 그 험난한 길을 저와 동행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잊겠어요.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오라버니들이 저를 도르곤에게 맡기고 돌아설 때 태연한 척하느라고 몹시 힘들었습니다. 가지 말라고 펑펑 울며 안기고 싶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종순이, 칠보, 다들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보고 싶어 하면,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요?
하루빨리 그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일 년 전에 썼던 서찰을 다시 읽어 보았다. 경대 서랍 속에 넣어 두고 묵혀 두었던 것을 무심코 꺼내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쓴 이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 서찰을 채 끝맺지도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서 끝까지 쓰지 못했고, 부모님이 이 서찰을 읽고 가슴 아파할까 봐 품어 두었다. 그 대신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 서찰을 보냈다. 정명수에게 서찰 심부름의 대가로 은 백 냥을 주고서. 도르곤이 죽은 뒤로 정명수는 더 이상 내게 굽실거리지 않았다.
오늘 보로의 장례를 마쳤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장례가 끝나니 갖가지 추억이 새록새록 밀려왔다. 그래서 오래전 서찰에 손이 간 것 같다.
보로는 나와 혼인한 지 꼭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가쁜 숨을 쉬다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보로는 책만 아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책 읽는 모습만 남아 있다. 그는 <논어>와 <맹자> 같은 유교 경전도 읽고, <삼국지>와 <수호지> 같은 소설도 읽었다. 끝없이 새로운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읽은 책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기도 했다. 특히 <수호지>를 자주 읽었다.
보로가 집을 비웠을 때 <수호지>를 한 번 읽어 보았다. 아버지가 틈틈이 글을 가르쳐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아버지께 감사했다. 조선에서 여자는 글을 배울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밥 짓고 옷 짓는 일만 가르쳤다. 종실의 여자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글을 알아야 세상을 알고, 큰일을 할 수 있다며 내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수호지>에는 이따금 알지 못하는 어려운 문자도 나왔지만, 내용을 알기에 큰 지장은 없었다. 등장인물도 참 많고 이야기도 여러 갈래인데,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썩은 관리들을 혼내 준다는 것이 중심 이야기였다.
나는 <수호지>를 읽으면서 소설 속의 일들이 조선에서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랐다. 청을 친 뒤 나를 구하겠다고 약속한 임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임금 혼자 힘으로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정 대신과 백성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임금의 편이 되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려면 썩은 관리들부터 도려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보로는 책을 읽을 때면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했다. 불러도 대답을 안 했다. 집에 있지만,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나를 집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는 혼인한 지 여섯 달쯤 되었을 무렵 보로에게 물었다. 그가 새 책을 구해서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청나라말을 어느 정도 익힌 터라 청나라말로 물었다.
“왜 나와 혼인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보로는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왜 묻지?”
“늘 책만 보시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그가 한숨을 폭 쉬었다.
“나는 힘없는 황족의 아들이다. 이 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나라는 내게 아무것도 못하게 하면서 옷과 음식과 집을 주었다. 그리고 아내도 주었지. 그래서 책만 보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보로가 횡설수설하는 줄 알았다. 말뜻을 곰곰 생각해 본 뒤에야 보로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임을 깨달았다.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서 그냥 책에 파묻혀 세월을 보낸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나는 너와의 혼인을 원하지 않았다. 언제든 이 집이 싫으면, 아니, 내가 싫으면 떠나라.”
보로는 말을 마치자마자 휭 바람을 일으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로의 가문이 권력 없는 황족이라는 사실은 혼인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보로가 권력에 대한 꿈마저 없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었다.
보로의 말처럼 나도 이 집에서, 청나라에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부터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몸이었다. 혼인 역시 내 의지대로 깰 수 없었다. 내가 보로와의 혼인을 깬다면 황제는 분노할 것이고, 그 분노는 조선에게 향할 터였다. 나는 청나라 황족의 아내이면서 황제의 소유물이었다. 또한 조선에서 청나라에 바친 선물이었다.
비록 선물의 신세이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나는 추억에 잠겨 있던 스스로를 깨웠다. 마음을 추스르고 경대 서랍에서 또 하나의 오래된 서찰을 꺼냈다. 도르곤이 죽고 얼마 뒤 이여중이 보낸 서찰이다. 소쩍새가 울던 밤 내전 기둥에 난데없이 화살이 꽂혔고, 그 화살 꼬리에 서찰이 매여 있었다. 익명의 서찰이었지만, 보낸 사람이 이여중이라는 것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왕후 마마 전 상서
이 서찰이 아직 상중(喪中)이신 왕후 마마께 누를 끼칠지 염려스럽습니다. 하오나 그냥 묻어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고합니다. 소인은 전하의 신참 병사이옵니다. 사냥터에서 종종 전하를 수행하였고, 비극이 일어난 그날에도 대열의 맨 뒤에서 전하를 받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점투성이였습니다. 사고가 난 곳은 전하가 자주 다니시던 길입니다. 자갈이 제법 박혀 있기는 하나, 말이 고꾸라질 정도로 크고 뾰족한 자갈이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뒷발을 쳐들며 몸부림쳤습니다. 앞다리에 줄이 걸리지 않는 이상, 말발굽을 뚫을 만큼 강하고 뾰족한 것이 살을 찌르지 않는 이상 말이 그렇게 펄쩍 뛰어오를 일은 결코 없습니다.
‘줄도, 뾰족한 그 무엇도 안 보여. 전하의 옥체가 낙마해 말에게 깔릴 만큼 큰 사고였는데…….’
저는 의문에 젖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하지만 어서 전하를 보전하라는 호통이 사방에서 쏟아져 의문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상할 수 없는 사고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전하가 낙마한 그 순간부터 모두 우왕좌왕하기만 했습니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군사들이 한순간에 오합지졸 잡배로 변해버리더군요.
전하의 옥체를 수습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오직 그것에만 몰두해 사고 원인을 파악하려는 마음은 누구도 먹지 못했습니다. 전하를 모시고 환궁해야 했기에 저도 그날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장군에게 고하고 마구간으로 달려가 말을 살폈습니다. 뒷다리에 손을 대자 녀석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고통스러워하더군요. 뼈가 일부분 으스러진 느낌이었습니다. 급히 마의(馬醫)를 불러 진찰을 당부했습니다. 마의는 말의 다리를 만져보자마자 대뜸 혼잣말하듯 말했습니다.
“뼈가 몇 조각 깨졌네. 사람 올라타면 부러지겠어. 쉬게 해.”
그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습니다.
‘말이 공격당한 것이다!’
직감이 벼락처럼 저를 내리쳤습니다. 직감은 또 벼락처럼 확신으로 바뀌었고, 득달같이 말이 쓰러졌던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길가 풀섶을 뒤지던 중 무언가 둥그런 물체가 밟혔습니다. 돌이었습니다. 평범한 돌이 아닌, 줄팔매에 쓰는 팔맷돌.
‘조선인일까?’
조선인이라는 의심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왕후 마마께는 송구하지만, 그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청에서 팔매질은 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라는 건 마마도 잘 아실 겁니다. 하오나 청에 눌러앉게 된 조선 포로들에겐 놀이가 아닌 생계입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냥에 나서야 하는데, 그 무기가 변변치 않아 장정들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팔매질을 익히지요.
달리는 말의 뒷다리를 명중시킬 정도라면 대단한 솜씨의 장정일 것입니다. 또한 감히 전하를 해한 것을 보면 상당한 권력자의 사주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후 마마, 더 진실을 캐보려 했으나 소인은 매인 몸이라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황제는 가장 먼저 전하의 군대를 해산시켰고, 저는 황제의 군졸이 되었습니다. 힘없는 저는 내일 떠나야만 합니다. 변방 초병의 임무를 명 받았기에.
왕후 마마, 황공하오나 소인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부디 강건하십시오. 마마는 이곳 조선 백성의 등불이옵니다. 마마는 잘 모르시겠지만, 아니라고 손사래 치실지 모르지만 많은 백성들이 마마의 은덕에 힘입어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동안 열 번도 넘게 읽은 서찰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을 울렸다.
‘내가 정말 조선 백성의 등불일까?’
이 질문 역시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져 본 것이다.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내가 조선 백성을 위해 한 일은 도르곤과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은 것뿐이라는.
오늘도 똑같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새로운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재주가 없어서? 아니, 비겁해서였다. 괜히 문제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나는 두려웠다. 두려워서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아 지냈다.
문득 이여중이 보고 싶었다. 나의 첫 격검 상대, 한 번도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는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처음 이 서찰을 읽었을 때 나는 의아했었다. 청의 군사가 조선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혹시 이여중은 조선 사람이 아닐까 짐작도 했었다. 그 짐작은 더더욱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조선 백성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청의 군사로 활약한다는 건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을 매듭 짓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백성을 갸륵하게 여기는 이여중은 조선인이 확실했다.
‘어디에 있든 부디 잘 지내시게.’
마음속으로 이여중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서찰을 접어 경대 서랍에 넣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갑자기 할 일이 태산처럼 많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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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태산처럼 많다 느꼈지만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뜰에 나와 목검을 수련하려 했던 것이다. 잠시 보름달에 원망을 풀어놓는 사이 침입자가 나타난 것이다. 여전히 보름달은 단칼에 두 쪽을 내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이여중?’
이제야 침입자가 이여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르곤의 격검 대회에서 나는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패배해 쓰러진 내게 손을 뻗으며 이렇게 묻던 그. 오늘 이여중의 앳된 목소리는 그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체격은 한결 커진 듯했다. 사내들은 보통 십오 세에서 십칠 세 무렵에 가장 왕성하게 자라므로.
‘내가 이렇게 아둔했었나? 진작 이여중인 걸 눈치 채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는 자신이 이여중임을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된 사람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법이니까. 어둠 탓에 눈빛을 똑똑히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랬다면 혹여 다음에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황제의 군대에 끌려간 사람이 어찌 내 앞에 나타났을까? 도르곤을 여의고 보로와 혼인해 살았던 것은 또 어떻게……?’
이여중일지 모를 침입자가 넘어간 담장에 무연히 시선을 던졌다. 한동안 작은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확인을 했으니, 소인 마음이 놓입니다. 앞으로도 부디 굳건함을 잃지 마시옵소서. 도르곤 전하의 영령이 마마를 지켜주리라는 기대는 거두시길 간청드립니다.”
침입자가 남긴 말이 자꾸만 귓가를, 머릿속을 맴돌았다. 보름달이 아까보다 몇 배 더 밝아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