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11. 나의 복수
“이보시오들!”
예경이가 오른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왼손으로 허리를 지탱한 채 문지기들에게 나아갔다. 어둠 속이지만 문지기들의 당황한 표정이 또렷이 보였다.
“도와주시오. 아기가 금방이라도 쑥 빠져나올 것 같소.”
“아니, 이 여편네가! 산파한테 가야지, 우리한테 이러면 어쩌오?”
“산파 집이 어디오? 길 좀 알려주오!”
나도 모르게 쿡 웃고 말았다. 천연덕스럽게 산모 시늉을 하는 예경이가 낯설어서였다. 예경이가 문지기들을 홀리는 사이 나는 모퉁이를 돌아 담을 타고 올랐다. 뜰 안을 빠르게 살핀 뒤 사뿐 뛰어내렸다.
심복이 사전에 알려준 방향대로 침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멈춰야 했다. 덩치 큰 풍산개 한 마리가 으르릉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나 심복이 파악한 사전정보에 수록되어 있는 녀석이었다. 단지 예상을 깨고 미리 나타났을 뿐이다. 정보대로라면 침소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겁을 먹지 않으려 마음부터 다잡았다. 심복이 일러준 대로 녀석은 젊고 쌩쌩한 편은 아니었다. 눈의 총기도 다른 풍산개들에 비하면 한결 덜했다.
“맛있는 거 줄게.”
나는 아이를 어르듯 말한 뒤 품 안에서 준비해 온 고깃덩이를 꺼냈다. 녀석의 눈앞에서 고깃덩이를 덜렁덜렁 흔들어 보였다. 녀석이 혀를 내밀더니 쫑긋 꼬리를 세웠다. 때맞춰 나는 고깃덩이를 멀리 던져버렸다. 녀석이 고깃덩이에 눈길을 못 박더니 사냥개답게 쏜살같이 목표물을 쫓았다. 동시에 나는 침소 쪽으로 온 힘을 향해 달려갔다.
침소 앞은 고요했다. 행랑에 자리한 호위무사의 방도 불이 꺼져 있었다. 하늘이 돕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늘을 짧게 올려다본 뒤 빠르게 뜰을 가로질렀다. 디딤돌에 조심스레 한 발을 올렸다. 살짝 긴장이 되었다. 복면을 한 번 고쳐 쓰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꼭 해야 할 일이야. 겁먹지 마.’
디딤돌을 딛고 대청에 올랐다. 살며시 방문을 한 뼘쯤 열었다. 어둠 속에서 코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에 골아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한결 자신감이 솟았다. 나는 방문을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이 든 부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문득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남편처럼 간악한 사람일지, 반대로 고결한 사람일지, 그저 질박한 여인네일지…….
부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목검을 빼들었다. 천천히 정명수의 목을 겨누었다. 마음 같아선 단칼에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이 목검이 번뜩이고 날카로운 장검이었으면 싶었다. 아쉬움의 한숨을 뱉고서 정명수의 목을 콕 찔렀다. 그는 깨어나지 않고 여전히 코만 골았다. 조금 더 세게 쿡 찔렀다. 그제야 정명수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나는 사내의 목소리로 힘 있게 말했다.
“일어나라. 내가 널 단죄하겠다.”
정명수의 눈에서 단숨에 잠이 달아났다.
“웬 놈이냐?”
정명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칼끝에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지, 지금…… 날 주, 죽이겠다는 것이냐?”
정명수는 겁에 질린 탓에 목검인 줄 모르는 눈치였다. 픽,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졸장부가 조선 백성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을 휘두른다는 게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둘 다 틀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첫째, 나는 ‘놈’이 아니다.”
나는 한 손으로 칼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가짜 상투를 확 벗었다. 정명수의 입이 하 벌어졌다.
“둘째, 나는 네 목숨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네게 참회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무엄한 년! 대관절 누군데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나는 대답대신 복면을 슬며시 내렸다가 썼다. 정명수는 전혀 예상 못한 상황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도르곤 전하를 해한 죄, 그 죗값을 묻겠다.”
돌연 정명수가 빙글빙글 웃었다.
“마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갓 역관일 뿐이옵니다. 전하는 간신배 무리들의 모함으로 인해 승하하신 것 아니옵니까?”
정명수는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계획한 바를 빨리 실행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참회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갓 역관으로서 도를 넘는 일을 참 많이도 했지. 이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똑똑히 가르쳐 주겠다.”
나는 날렵하게 목검을 쳐든 뒤 정명수의 정수리를 딱 내리쳤다. 정명수가 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온 힘을 다한 일격에 그는 혼절해 버렸다. 짧은 소란에 정명수의 부인이 잠에서 깼다. 한밤중 날벼락 같은 광경에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인은 남편을 살필 염도 못 내고 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본래 내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정명수는 많은 사람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부인은 부디 남편과는 다른 길을 가길 바랍니다.”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침소를 빠져나갔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둠이 한층 더 깊어졌지만 마음속은 등불이 켜진 듯 환했다.
“마마, 속이 후련하신 모양입니다.”
내 변화를 눈치 챘는지 예경이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예경이 목소리도 한결 밝아진 느낌이었다.
“글쎄다. ‘후련하다’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진 건 분명하구나. 넌 어떠냐? 많이 긴장했을 텐데.”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락가락합니다.”
“오락가락?”
“마마께서 계획하신 일이 별 탈 없이 갈무리되어 마음이 가볍긴 한데, 긁어 부스럼을 낸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예경이는 가슴 한 켠을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예경이의 마음이 무거운 까닭,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예경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마, 왜 아무 말씀 없으신지요?”
“그냥, 듣고 싶다. 네 얘기를. 계속 해보려무나.”
예경이가 한숨을 폭 쉬고는 입을 열었다.
“정명수를 따끔하게 훈계하고 목검으로 매질하신 거, 제게는 그것만 일러주셨잖아요. 근데 왜 굳이 마마의 정체를 드러내셨는지요?”
“복수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말이지?”
“송구하지만, 소인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마마의 안위가 염려스럽습니다.”
나는 소리 내어 호호호 웃었다. 예경이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걱정 마라. 우릴 뒤쫓고 있는 건 하늘의 별들뿐이니.”
걸음을 멈추고 예경이를 돌아보았다. 예경이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예경아, 나는 복수의 여지를 없애려고, 일부러 내 얼굴을 보인 것이야.”
“예? 의도하신 거라구요?”
“그렇단다. 정명수 그 자도 지극히 못났으나 엄연한 사내 아니냐. 나는 사내의 체면을 건드린 것이란다.”
예경이는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계집한테 당한 사내라면, 팔푼이가 아닌 이상 그 일을 떠벌리지 못할 거야.”
“창피해서요?”
“그렇지. 정명수가 혹시 깨어났다면 아마 모욕감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거야. 여인한테 당했지, 게다가 아이처럼 목검으로 머리를 맞았지, 술안주로 올리기 딱 좋은 꼴을 당했잖아.”
“차라리 진짜 장검에 찔렸다면 덜 창피했을 텐데요. 애들 장난처럼 목검으로 머리를 딱 맞았으니, 호호호.”
예경이는 통쾌하고 고소한지 방글방글 웃었다.
“내가 예경이 네게 당부할 일이 있다. 들어줄래?”
“여부가 있나요? 당연히 이행해야죠.”
“날이 밝으면 마을에, 특히 아이들한테 소문 좀 내주려무나. 역관 정명수가 정체 모를 여인 자객에게 간밤에 집에서 목검으로 머리를 맞았다고.”
예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순간 의문이 생겼는지 눈을 반짝였다.
“정체 모를 여인 자객. 사실과 다르게 소문을 내시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소문을 부풀리기 위해서. 신비감을 더하면 소문의 몸집은 더 커지기 마련이란다. 그럴수록 정명수는 고립될 테지.”
“역시 마마세요. 마마의 지혜에 무릎을 탁 칩니다, 호호호.”
예경이는 정말로 자기 무릎을 탁 쳤다.
“그나저나 너 산모 흉내를 아주 잘 내더구나. 산파들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겠어.”
“솔직히 정말 떨렸는데요. 지금은 배가 홀쭉하니까 왠지 허전합니다.”
예경에는 등에 멘 이불보따리를 슬쩍 보이며 웃었다. 이불보따리를 품에 넣어 산모 흉내를 내겠다는 건 예경이의 발상이었다. 그 발상이 큰 도움이 됐다.
“마마도 사내 흉내, 아주 그만입니다. 영락없이 용맹한 장부의 모습이었어요, 호호호!”
“그러냐?”
“그러고말고요.”
예경이가 활짝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소리 내어 함께 웃었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어둠을 울리자 사위가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하늘의 별이 우리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반짝이는 별은 도르곤의 눈동자 같았다.
나는 하늘의 눈동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제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청에 남아 백성을 위한 일을 하려 합니다. 전하, 제게 힘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