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별송이 Oct 24. 2024

의순공주 이애숙 13

팩션 역사소설

13. 꺼지지 않는 불


  1656년 4월 26일, 나는 조선에 돌아왔다. 눈과 얼음을 피해 오느라 다섯 달이나 걸렸다. 내가 귀에 동상이 걸린 일도 행차가 늦어지는 데 한몫했다.

  임금의 배려로 나는 궁 대신 집으로 먼저 갈 수 있었다. 임금은 내게 집에서 이틀 쉬고 사흘째 되는 날 입궁하라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나만 부모님을 속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오랑캐에게 딸을 팔아먹은 아버지야.”

  “전하뿐만 아니라 청에서도 곳간이 터져 나가도록 쌀과 비단을 주었다네. 이개윤은 딸 없이는 살아도 쌀과 비단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생색만 내고, 집에 빼곡히 쌓아 놓았다는구만.”

  “에미가 애비보다 더 나빠. 애비가 딸을 팔아먹는데, 팔짱만 끼고 있었다며?”

  내가 청으로 떠난 뒤 사람들은 부모님을 이렇게 비난했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비난은 한여름 소나기처럼 사나웠다. 비난에 앞장선 사람들은 조정 대신과 사대부 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저급한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꿋꿋이 행동했지만, 마을 사람들마저 수군거릴 때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애쓴 공으로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애련이가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까맣게 모를 뻔했다. 이처럼 조선은 육 년 만에 돌아온 내게 실망부터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곳곳에 상처를 새겨 주었다.



  조선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임금을 만났다. 뜻밖에도 임금은 나를 반기지 않았다. 어쩐지 나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나는 임금이 내게 미안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청을 치고 나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다. 임금은 형식적인 인사말만 몇 마디 건네고 나와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다음 날 아침, 궁궐에서 사람이 왔다. 아버지를 삭탈관직하겠다는 임금의 명을 가지고.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애초부터 너를 조선으로 데려오리라 마음먹고 사신을 자원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네가 돌아오는 것을 반대할까 봐 임금에게만 은밀히 뜻을 전했다. 황제에게 너를 보내 달라고 상소를 올릴 테니, 모른 척해 달라고 부탁했지.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밀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왔던 사신 중 한 명이 아버지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일을 조선 조정에 고스란히 알린 것이다. 황제를 만나기 전에 나를 먼저 만난 일도 빼먹지 않고.

  조정은 큰 불이라도 난 것처럼 뒤집어졌다. 사신이 조정의 허락 없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것은 조정은 물론 임금까지 업신여긴 행동이라며 길길이 뛰었다. 더구나 황제를 만나기 전 나를 만난 일은 사신의 본분을 저버린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임금은 모르는 척하며 대신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럴수록 더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아버지와 내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삭탈관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에 다다르기 한 달 전부터는 말 그대로 상소가 빗발쳤다. 임금은 결국 대신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우스운 것은 아버지의 잘못을 고자질한 사신과 나머지 한 명도 더불어 삭탈관직당했다는 것이다. 대신들은 그들 역시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수행했다며 아버지와 똑같이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읽은 임금은 곧바로 서찰을 보내 왔다. 서찰에는 미안하다고 쓰여 있었다. 또 청을 치고 나를 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고 쓰여 있었다.  

  임금은 서찰에다 새로운 약속도 한 가지 써서 보냈다.


나라를 위해 청에서 애쓴 너에게 평생 곡식을 내리겠노라. 


 이 글귀를 보고 웃고도 싶었고, 울고도 싶었다. 괜히 돌아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요. 아무리 한여름이지만 이렇게 더울 수가 있을까요?”

  예경이가 툇마루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예경이에게 훨훨 부채질을 해주었다. 예경이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마마, 황송합니다. 제게 부채질을 해 주시다니요!”

  “괜찮다. 앉거라.”

  “이러지 마십시오, 마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방문 너머로 팔을 쭉 뻗어 부채질을 하자 예경이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뒷걸음질 쳤다. 참 착하고 어여쁜 아이였다.

  공주는 혼인을 하면 궁을 나가 사는 것이 조선의 법이다. 청의 왕후에서 조선의 공주로 돌아온 나는 그 법에 따라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어차피 궁에서 살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집에서는 청에서 지낼 때만큼 시중드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임금에게 예경이를 내전의 궁녀로 거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예경이는 한사코 나와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고 우겼다.  

  “예경아, 우리 오목골 가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글까?”

  “어머, 좋아요! 애련 아씨도 함께 갈까요?”

  “그러자꾸나.”

  날이 무더운 탓인지 바깥에 나온 사람은 나, 애련이, 예경이 셋뿐이었다. 덕분에 사람들 눈치 볼 것 없이 우리는 마음껏 떠들면서 걸었다. 마을 한복판인 당산나무 아래를 지날 때쯤에야 빨래하고 돌아오는 아낙들과 마주쳤다. 

  나는 아낙들과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나를 보는 아낙들의 눈빛이 곱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곧 등 뒤에서 나를 헐뜯는 말들이 들려왔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봐. 밝은 대낮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흙탕물에서 뒹굴다가 왔는데 새삼 뭐가 부끄럽겠어, 호호호.”

  나는 내 귀가 밝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애련이도 얼핏 아낙들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지금 언니 욕한 거 맞지? 들었어?”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

  “언니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쓰여 있잖아. 저 여편네들을 그냥 확!”

  애련이가 팩 돌아서더니 아낙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애련이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참아, 애련아. 난 괜찮아. 이제 저런 말 듣는 거 익숙해.”

  “난 안 익숙해. 속에서 불이 난다고!”

  “그 불, 이제 꺼. 평생 뜨겁게 살 수는 없잖니.”

  애련이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우리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를 우러러보았다. 문득 이 나무가 왜 나와 우리 가족을 지켜 주지 않는지 궁금했다. 파란 하늘을 가리고 있는 푸른 잎들이 원망스러웠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환향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앞에서는 밝게 웃고, 돌아서면 환향녀라며 끌끌거렸다. 누군가는 대놓고 손가락질했다. 내 온몸에 시커먼 때라도 묻었는지 멀리서부터 피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버지가 삭탈관직당한 일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언니는 그 불 끌 수 있어?”

  애련이의 물음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꿎은 예경이를 끌어들였다.

  “예경아, 웬 땀을 그리 흘리니? 얼굴이 번들번들하다. 얼른 시원한 계곡물로 씻어야겠다.” 

  나는 예경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목골을 흐르는 계곡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참방참방 멱을 감는 아이들의 모습이 시원함을 더했다. 우리 마을 애들과 다른 마을 애들이 어울려 놀고 있으니 더욱 보기 좋았다. 어른들 사이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조막만 한 놈들이 계곡을 다 차지하고 있네. 지들이 여기 임자인 줄 아나?”

  애련이가 밉지 않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뭐.”

  문득 나는 육 년 전 어름삐리가 떠올랐다. 어름삐리도 딱 저 아이들만 했었다. 

  ‘그 작은 녀석이 줄에서 떨어지고 얼마나 아팠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폭 나왔다. 그러자 애련이가 내 팔을 툭 쳤다.

  “웬 한숨? 속에서 불나서 그래?”

  “아, 아니야. 불 얘긴 그만 좀 하렴. 자, 우린 저쪽으로 가자.” 

  우리는 아이들 맞은쪽, 물이 얕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우리를 한 번 힐끔 보더니 다시 물놀이에 빠져들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손으로 물을 떠서 가볍게 얼굴을 닦았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서 첨벙 하고 물이 튀었다. 아이들이 돌을 던진 것이다. 나는 꼼짝없이 찬물을 뒤집어썼다. 

  “환향녀!”

  “물 더러워지니까 씻지 마.”

  돌이 잇따라 핑핑 날아왔다. 돌에 맞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무서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냥 귀엽기만 했던 아이들이 악귀처럼 변하다니! 더구나 내가 아는 아이도 몇 있었다. 그 아이들도 나에게 돌을 던졌다.

  “이놈들이!”

  예경이와 애련이가 아이들을 잡으러 쫓아갔다. 하지만 다람쥐처럼 재빠른 아이들이 붙잡힐 리 없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푹 주저앉았다.

  ‘안간힘을 쓰며 잡고 있던 지푸라기마저 놓쳐 버린 기분이야…….’

  몸이 깊은 물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언니, 언니 괜찮아?”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애련이었다. 

  “으, 응.”

  나는 눈만 뜨고 있었지 넋을 완전히 잃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쥐 같은 놈들. 어찌나 재빠른지 금세 내빼 버렸어.”

  애련이와 예경이 둘 다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붙잡은들 뭐 하겠니.”

  “뭐 하긴! 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 줘야지. 두 놈은 우리 집하고 가까운 데 사는 것 같던데…….”

  애련이는 분을 못 참겠는지 이를 득득 갈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처럼 괴로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아이들마저 나를 환향녀라고 하니, 진짜 환향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쪼그려 앉아 찬 계곡물에 얼굴을 벅벅 씻었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바윗돌처럼 무거웠다. 숲을 나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쿠억!”

  갑자기 괴이한 짐승 소리가 들렸다.

  “으아!”

  애련이와 예경이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시커먼 멧돼지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멧돼지는 침을 게게 흘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우리 셋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목검이 있었다면…….’

  여인이 칼을 지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몽둥이로 쓸 만한 것을 구하려 재빨리 주위를 살폈지만 잔가지들만 눈에 띄었다. 멧돼지가 마치 이런 나를 비웃듯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나는 애련이와 예경이를 막아서며 나직이 말했다.

  “멧돼지에게 등을 보이면 위험하니까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도망가. 여긴 나한테 맡겨.”

  “안 돼!”

  애련이가 단호하게 내 말을 거부했다.

  “마마와 같이 죽을지언정 혼자 두고는 못 가요.”

  예경이도 거역의 뜻을 밝혔다.

  “다들 어서 가!”

  내 고함이 메아리 칠 때 덤불을 헤치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물러서요!”

  사내는 휙 날아오르더니 막대기로 멧돼지의 대가리를 세게 내리쳤다. 번개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정통으로 맞은 멧돼지는 휘청휘청하더니 푹 고꾸라졌다.

  사내가 우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덤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사내는 젊은 장정이었고, 절름발이였다. 멧돼지를 내리친 막대기는 그의 지팡이였다. 사내가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절뚝 빠르게 나아갔다.

  “잠깐만요!”

  고마움을 표하고자 급히 사내를 불렀다. 사내가 어정쩡한 동작으로 반쯤 돌아보았다. 정면이 아니었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복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친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이여중!”

  사내의 눈빛이 짧지만 또렷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커졌다. 한순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육 년 전 내게 청으로 떠날 동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어름삐리의 얼굴. 광복이라는 이름의 어름삐리는 줄타기 당시 여자애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사당패의 막사에서는 거리를 둔 채 얼굴을 마주했었다. 하지만 광복의 눈동자만은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줄에 발을 내딛기 전 부채를 펼칠 때 구슬처럼 반짝이던 그 눈방울…….

  ‘격검에 진 날 일으키려 다가왔을 때 눈을 가늘게 뜬 것도,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였구나!’ 

  이여중은 못 들은 척 갈 길을 가려 했다. 나는 한 걸음 나아가며 소리쳤다.

  “어름삐리! 네가 광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찌하여 이여중으로 살게 된 것이냐?”

  이여중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광복이는 누구고, 이여중은 또 누굽니까? 떠돌이한테 이름 같은 거 없습니다.”

  “넌 내 생명의 은인이다. 은혜를 갚고 싶으니 같이 가자. 내가 거처를 마련해 주마.”

  “멧돼지가 깨어날 수 있으니 어서 가세요. 잠깐 기절만 시킨 겁니다.”

  “네 다리! 무슨 연유로 불구가 된 것이냐? 몸을 잘 건사했어야지!”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워 말했다. 이여중은 무예가 출중하고 앞길이 창창한 병사였다.  

  이여중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불쑥 달려가서 그를 부둥켜안고 싶었다. 왜 나를 모르는 체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만 정착해서 살자고 달래고 싶었다. 내 몸이 저절로 한 발짝 움직였다. 그 순간 이여중은 덤불 속으로 호랑이처럼 휙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애련이가 날 흔들었다.

  “언니, 어서 가자. 멧돼지 깨면 어떡해?”  

  하루 동안에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것 같았다. 어름삐리를 이여중으로 만든 게, 이여중을 불구자와 떠돌이로 만든 게 다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고향에 돌아오지 말 것을…….’

  고향에 돌아온 것도 내 잘못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


 

“쯧쯧. 도무지 차도가 없네.”

  의원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마치 병이 낫지 않는 게 내 잘못이라고 탓하는 것 같았다. 의원은 진맥을 멈추고 내 손목을 툭 내려놓았다.

  “침도 놓고, 좋은 약은 다 써 봤는데, 효험이 없네요. 저…… 불쾌하시겠지만, 다른 의원을 찾아보시죠. 저는 그만 손 떼겠습니다.”

  의원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어머니는 묵묵히 의원을 보냈다. 벌써 네 번째 의원이었다. 용하다는 의원들이 다들 나를 고치려다가 두 손을 들었다.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조선의 의원들은 다들 얼치기인가 보다. 어째서 병명도 알아내지 못하는지…….”

  나는 힘을 내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너무 애쓰지 마세요. 지난번 의원이 제게 마음의 병이라고 했잖아요. 마음의 병은 어의도 못 고칩니다. 기다려 주세요. 곧 훌훌 털고 일어날게요.”

  “병자가 스스로 병을 고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어머니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울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어머니, 왜 우세요? 들어가도 돼요?”

  애련이의 목소리였다.

  “아, 아니다. 그냥 이, 있거라.”

  “괜찮아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다들 들어오라고 하세요. 어차피 의원도 갔는데.”

  “의원이 되도록 사람을 방에 들이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날마다 보는 얼굴들인데, 좀 못 보면 어때!”

  어머니는 울음을 꾹 멈추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참, 저녁때 애진이가 네 형부랑 온다고 했다. 그때까지 푹 쉬거라.”

  “어, 언니가요?”

  “그래. 너 걱정돼서 온다는구나.”

  언니가 온다고 하니 갑자기 목이 메었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를 이런 꼴로 맞이해야 한다니…….

  “쉬거라. 나도 나가 보마.”

  기운이 없어서 어머니도 쉬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힘없이 일어나서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왠지 부끄럽고 죄송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 뒤 어머니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틈을 타 환한 햇살이 달려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햇살의 센 기운이 느껴졌다. 

  고향에 돌아온 지 벌써 오 년이 지났다. 오 년 동안 나는 죄인으로 살았다. 사람들이 나를 죄인으로 여겨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석 달 전에 몸져누워서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애숙, 의순공주, 환향녀.

  이들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이라면, 나는 이애숙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애숙은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별 걱정 없이 살았다.

  의순공주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의순공주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그 마음은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무엇 하나 변변하게 하지 못했고, 나중엔 천덕꾸러기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 의순공주가 바보천치 같다. 

  그리고 환향녀. 세상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여자. 나도 환향녀가 싫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환향녀와 이별할 수 없다. 세상은 환향녀에게 이별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어름삐리, 광복이, 이여중이 생각난다. 멧돼지로부터 나를 구해준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를 찾으려 수십 번 숲을 뒤졌지만, 이웃마을까지 뒤져봤지만 발자국조차 만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 누를 끼치기 싫어 떠난 걸까? 환향녀 곁을 맴도는 사내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내가 더 곤경에 처할까봐? 

  그가 어디에 있든 부디 무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더는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것도 아마 다른 사람을 돕다 그리 되었으리라. 

  이애숙, 의순공주, 환향녀. 이 세 사람이 겪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많이 아프다.

  어머니가 없으니까 더 아프다.

  내가 마음의 병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낮인데, 왜 자꾸 주변이 어두워질까? 

  병을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데……. 마음먹은 일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나는 내가 겪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벼슬아치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백성이 생기지 않도록 바른 정치를 해 달라고. 

  그러나 이 일을 계획하자마자 나는 병을 얻고 말았다. 한 달만 더 일찍 이런 마음을 먹었더라면……. 토끼처럼 굴속에 숨어 살았던 세월이 후회된다.

  벽에 걸린 목검이 자꾸만 희미해진다. 이여중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가 보고 싶다. 그를 찾아 더불어 새로운 삶을 꾀하고 싶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잠이 내 몸을 짓누른다. 내 방에만 밤이 찾아온 걸까? 언니를 못 볼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끝-

이전 12화 의순공주 이애숙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