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12.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농사를 지은 지 삼 년째다. 첫 해는 육백 석, 지난해에는 오백삼십 석, 올해는 오백 석에도 미치지 못했다.
‘세자빈 마마는 어떻게 삼천삼백 석이 넘는 쌀을 거두었을까? 마마는 정말 그릇이 큰 분이었어.’
나는 논둑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벼들이 베어진 논들이 텅 빈 집처럼 쓸쓸해 보였다.
보로가 죽자 순치제는 나를 조선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굳이 나를 청나라에 묶어 둘 필요가 없다면서. 나는 황제의 명을 거절했다. 조선을 위해 청에 왔는데, 아무 한 것 없이 털레털레 돌아가기는 싫었다. 당장 달려가 가족의 품에 안기고도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황제에게 더 이상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자빈이 볼모 생활을 할 때 일구어 놓은 농지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 농지에서는 여전히 경작이 이뤄지고 있었지만, 세자빈 때만큼 활기차지는 않았다. 세자빈이 조선으로 돌아간 뒤 많은 농부들이 줄줄이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세자빈처럼 장사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없었지만 의욕과 책임감을 갖고 덤벼들었다.
‘농사는 의욕과 책임감만으로는 안 되는 걸까? 세 해 동안 연거푸 실패만 하다니…….’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논둑 한 귀퉁이의 흙이 투둑 떨어져 나갔다. 하마터면 논둑 아래로 떨어질 뻔했던 나는 반짝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포기해선 안 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마마,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예경이였다. 기척도 없이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던 걸까?
“너는 참 찰거머리 같구나. 혼자 산보 좀 한다고 기다리랬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달려왔느냐?”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면서 예경이를 꾸짖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곧 어두워집니다.”
“아니다. 좀 더 있고 싶구나.”
“실은 가마꾼들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요.”
“핑계 참 좋구나.”
나는 핀잔을 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가마꾼을 위하는 예경이의 마음씀씀이가 참 고마웠기 때문이다. 예경이 덕분에 나아진 기분이 포기를 떠올리며 나약해지려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 한 번 더 들녘을 둘러보았다. 들녘 너머 작은 농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청은 농지가 드물다. 때문에 농부들의 집과 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농부들은 농막에서 지내며 농사를 짓다가 추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경작이 없는 겨울은 따뜻한 집에서 보낸다. 하지만 아쉽게도 청나라 농부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조선인 농부들은 대부분 집이 없다. 농막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살아야 한다. 주인집에 얹혀사는 노비만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겨울에는 차라리 노비의 팔자가 더 낫기도 하다.
곧 겨울이었다. 나는 겨울에도 농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기를 소망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냐 아니냐는 내 손에 달려 있어.’
다시 한 번 일어서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뜬금없이 배가 고팠다.
“예경아, 어서 가자. 나도 배가 고프구나.”
아침바람을 쐬려고 정원으로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파리만 파랗던 감나무에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네. 하룻밤 사이에 감이 열리다니.’
나는 종종걸음으로 감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화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서 까마귀 떼가 날아올랐다.
어안이 벙벙했다. 까마귀는 한 마리도 안 보였는데, 언제 감나무에 앉아 있었던 걸까?
까마귀 떼는 눈 깜빡할 새에 사라졌다. 그런데 감나무에 감이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까마귀를 감으로 잘못 본 것일까? 순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악 소리를 질렀다.
“꿈이었구나!”
참 해괴망측한 꿈이었다. 기분 나쁜 꿈 탓인지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나쁜 기분을 털어내려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문득 바깥바람이 쐬고 싶어졌다.
“늘 느끼는 건데, 마마는 머릿결이 참 고우세요.”
예경이가 내 머리를 빗기면서 아양을 떨었다.
“오랜만에 저잣거리에 나가자니까 네가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내 칭찬을 다 하고.”
“섭섭합니다, 마마. 제가 뭐 기분이 나쁠 땐 칭찬의 말씀을 안 드렸나요.”
“호호, 토라지기도 참 잘하는구나.”
“아닙니다, 마마. 저 안 토라졌어요.”
그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마,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어떤 손님이냐?”
“조선의 사신이라고 합니다.”
나도 예경이도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선의 사신이 찾아올 까닭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해라.”
예경이에게 머리 빗기를 서둘러 마무리하라고 했다. 긴장했는지 예경이의 손이 떨렸다.
“마마, 전 나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나가면서 손님을 들이라는 말을 전해다오.”
예경이가 나가자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가족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조금 뒤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조선 관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푹 쓰러질 뻔했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다.
“애숙아!”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버지! 어떻게 여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가 다가와 내 두 손을 잡았다.
“청에 공물을 바치러 왔다. 널 만나려고 내가 전하께 사신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단다.”
“이 먼 길을 오시다니! 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지금 막 도착했구나. 황궁으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른 것이다.”
“왜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황제가 알면 크게 노할 거예요. 조선의 사신이 황제를 제일 먼저 뵙지 않고, 황족의 집에 들르다니요. 어서 황궁으로 가세요.”
“그래. 얘기는 나중에 하자. 우선 애비도 사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 아마 이틀 뒤에나 볼 수 있을 게다.”
아버지는 내 손을 놓으며 못내 아쉬워했다.
아버지가 나간 뒤 곰곰 생각했다. 하필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에 아버지를 만났다는 게 영 찜찜했다. 황제보다 나를 먼저 만났다는 것도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황제는 모르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문제는 아버지와 청에 동행한 사신 일행이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를 만나기 위해 그들에게 허락을 구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그냥 넘어가겠지만, 언젠가 아버지를 걸고넘어질 일이 생길 때 오늘 일을 무기처럼 꺼내들 수도 있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아버지가 들을 리가 없는데도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이틀이 아닌 나흘 뒤에 다시 왔다. 나흘 만에 무척 수척해진 것 같았다.
나는 보로가 쓰던 방에서 아버지에게 차를 대접했다. 보로가 세상을 뜬 후 줄곧 비어 있던 방에 아버지가 있으니 어쩐지 든든했다. 아버지를 그 방에서 모시고 함께 살고 싶었다.
“차 향기가 참 그윽하구나.”
“천천히 음미하며 드세요. 계속 우려 드릴게요.”
“오 년이란 시간이 짧지만은 않구나. 네가 이렇게 성숙한 걸 보니.”
아버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심코 아버지의 손에 눈길이 갔다. 얼굴만 뵈었을 땐 그저 야위었다는 느낌만 받았는데, 손을 보니 아버지가 많이 늙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은 다 잘 지내고 있나요?”
아버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잘 있다.”
아버지의 대답이 너무 짧아 조금 아쉬웠다.
내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데,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애숙아!”
“예, 아버지.”
“황제께 상소를 올렸다. 너와 함께 조선에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아버지의 말에 찻잔을 옮기던 손이 딱 멈춰졌다.
“……저를 데려 가려고, 그래서 일부러 사신을 자원하신 거예요?”
“그래. 이 방법밖에 없었다. 사신 자격이 아니면 연경에 오기도 어렵고, 온다 해도 황제께 상소를 올린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단다.”
“황제는 뭐라고 하던가요? 대답을 들으셨어요?”
“어제 대답하셨다. 대답을 듣고 오느라 예정보다 이틀 늦게 온 거야.”
아버지는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황제께서 허락하셨다. 사신 임무를 마치면 함께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어.”
“아직…… 아직은 안 돼요.”
“뭐? 안 가겠다는 얘기냐?”
“예.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이대로 돌아가면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 백성들은 네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아. 아니, 이제 널 기억조차 못할 거다.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걱정하며 사는 백성들은 이역만리에 있는 너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아버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날 잊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백성들에게 청으로 시집 간 조선의 공주는 밥 한 숟가락보다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백성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은 내 자신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아버지가 나를 다그쳤다.
“한시바삐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거라.”
“언제, 언제 떠나실 예정인가요?”
“스무 날쯤 뒤에 간다.”
“그때쯤이면 몹시 춥겠군요.”
“상관없다. 차라리 추워서 압록강이 꽝꽝 얼었으면 좋겠다. 배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영 번거로운 일이라.”
“아버지.”
“그래.”
“제가 여기서 오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아세요?”
“잘 알다마다. 청의 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나는 네 안부를 물었다.”
“그럼 제가 보낸 서찰들이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아셨겠군요.”
“널 탓할 생각은 없다. 넌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은 아이였으니,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그런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정 죄송하다면 이제 조선에 가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일 년만, 일 년만 더 청에 머물면 안 될까요? 저와 함께 일하는 농부들에게 풍작의 기쁨을 안겨 주고 싶어요.”
“……만약 또 흉작이 되면 어쩔 셈이냐? 농부들에게 더 큰 상처만 줄 텐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때 가서 황제의 마음이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지금 떠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야.”
아버지를 이기기 어려웠다. 새삼 내가 말주변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던 차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아버지가 황궁으로 돌아간 뒤 다시 차를 끓여 혼자 마셨다.
나는 점심도 거르고, 저녁까지 걸렀다. 마음이 복잡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밤에 예경이를 불러 함께 정원에 나갔다. 구름이 달을 가려 어두웠지만 감나무의 감들은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예경아.”
“예, 마마.”
“청녕궁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니?”
“아…… 뜰에서 청녕궁 궁녀와 함께 계셨던 날이요? 제가 몰래 숨어 있다가 마마께 들켰지요.”
“잘 기억하는구나. 근데 예경아, 네 생각엔 말이다.”
“예, 마마.”
“그 청녕궁 궁녀가 조선에 돌아가는 게 낫겠느냐, 아니면 청에 그대로 머물러 사는 게 낫겠느냐?”
예경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마마,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시나요?”
예경이는 내가 그런 질문을 한 까닭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예경아, 그럼 다른 걸 물을 테니 솔직히 대답해 주거라.”
“당연히 솔직히 대답해야지요.”
“그래. 그렇다면 물으마. 너는 조선에 돌아가고 싶으냐?”
예경이는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예경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경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송구합니다, 마마. 소인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흑……!”
예경이는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마, 저는 마마의 것입니다. 마마의 뜻대로 하십시오.”
“무슨 소리! 넌 너일 뿐이지, 나의 것이 아니야.”
“제 어머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마마가 조선을 떠나기 몇 달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흑……!”
예경이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오 년을 함께 지냈지만, 예경이가 가족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네가 나를 따라온 게 답답한 궁궐 생활이 싫어서만은 아니었구나. 부모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구나.’
나는 내 옷고름으로 예경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예경이의 눈물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예경이를 위해서라도 조선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백성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한 사람 예경이에게라도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예경이도 조선의 백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