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역사소설
5. 여행
줄곧 서너 발짝 앞서 가던 칠보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씨, 아니아니 황송합니다, 공주 마마.”
나를 ‘아씨’라고 불렀던 칠보는 큰 죄라도 지은 듯 머리를 조아렸다. 지게에 지고 있던 쌀가마가 기우뚱할 정도였다.
“괜찮네. ‘아씨’란 말이 입에 붙은 지 오래인데, 하루아침에 호칭을 바꾸긴 힘들지.”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공주 마마.”
“괜찮대두.”
솔직히 나는 편하게 아씨라 부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칠보를 더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아 꾹 참았다.
칠보가 먼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계곡에 사당패가 진을 치고 있답니다. 내리막길 갈 때 조심하십시오.”
“나야 맨몸인데 무얼 걱정인가. 자네야말로 잘 살펴 가게나. 지게가 번거로울 텐데.”
“별말씀을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공주 마마.”
“잠깐! 사당패 듣는 데서는 ‘공주 마마’란 말, 입 밖에 꺼내지 말게나. 괜히 누를 끼치긴 싫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산비탈에 서자 사당패의 막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밥을 짓는지 커다란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 내려갈 땐 발바닥에 힘을 꼭 주셔야 합니다. 준비 되셨나요, 마마?”
칠보의 물음에 나는 부러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 됐네. 어서 내려가세.”
남사당 두 명이 칠보와 나를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왔다. 그중 한 명은 키가 장대처럼 컸다.
“뉘시오?”
“허어, 이분이 누군지 알고 감히! 이 나라의…….”
삐딱하게 묻는 키다리 남사당에게 칠보가 꼬장꼬장 대꾸했다.
“그만하게.”
나는 서둘러 칠보의 말을 막았다. 굳이 신분을 드러내 사당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놀음에 감탄하여 늦었지만 쌀을 드리고 싶어 왔소. 꼭두쇠에게 일러주시오.”
키다리 남사당은 나와 칠보를 빠르게 쓱 훑어보았다.
“차림새를 보아 하니 지체 높으신 분의 여식인가 보오.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때 칠보가 끼어들었다.
“무례한 걸 알았으면 얼른 꼭두쇠를 불러주시게나.”
이번엔 작달막한 남사당이 나섰다.
“꼭두쇠 성님은 낮잠에 푹 빠져 있으니, 쌀가마는 그냥 여기 부려 주시오. 고맙게 받겠소.”
그 말에 칠보가 내 눈치를 잠깐 살폈다.
“칠보, 그렇게 하게. 이들이 원하는 대로.”
“예, 아씨.”
칠보는 지게를 벗어 내려놓았다. 쌀가마를 들어올릴 때 키다리 남사당이 칠보를 거들었다. 덕분에 칠보는 한결 가뿐하게 쌀가마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키다리 남사당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비록 천한 떠돌이들이지만 염치는 있는 놈들이오. 쌀, 무진장 고맙소, 하하하. 사실 이 마을에선 별로 건진 게 없어서 예정보다 이틀이나 당겨 내일 떠날 예정이었소.”
그 말에 나는 멀리 커다란 밥솥에 눈을 주었다.
“다행히 저 무쇠솥이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겠구려.”
내 말이 재미있었는지 두 남사당 모두 빙그레 웃었다.
“하나만 물읍시다. 어름삐리는 괜찮소?”
“어름삐리?”
“왜, 놀음하다 줄에서 떨어진 광대 말이오. 행여 많이 다친 건 아닌지…….”
작달막한 남사당이 픽 웃더니 대답했다.
“하룻밤 몸살 앓고 거뜬히 일어났어요. 다치는 거야 뭐, 우리한텐 밥 먹듯이 자주 있는 일이라. 아니, 굶기도 다반사니, 그 말은 취소요, 하하하.”
“다행이오. 염려스러웠는데.”
그때 앳된 모습의 남사당이 밥솥 근처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어름삐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어름삐리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가 오십 보쯤 될까? 그런데 어쩐지 바로 앞에서 어름삐리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얼떨결에 손을 들어 어름삐리를 향해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손인사에 놀란 어름삐리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광경에 두 남사당이 킬킬거렸다.
“광복이 저놈, 아직 여인을 몰라요.”
“오늘밤 꿈자리가 뒤숭숭하겠네. 몽정할 때는 되었나?”
남사당들의 걸쭉한 농담에 칠보가 발끈했다.
“말을 가리시오. 감히 공주 마마 앞에서.”
나는 칠보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키다리 광대가 표정을 싹 바꾸며 말했다.
“공주 마마? 댁들 궁에서 온 거요?”
“댁들이라니!”
칠보가 내 눈치를 살피며 씩씩거렸다. 나는 한 손으로 슬며시 칠보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다리 광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공주 마마, 왜 누추한 사당패 소굴에 몸소 행차하셨는진 모르겠사오나, 이 쌀 가지고 얼른 돌아가시지요. 저희는 궁궐에서 나온 곡식은 못 먹습니다. 몸에 안 맞아 두드러기가 나거든요.”
키다리 광대가 목례를 올리고는 휙 돌아섰다. 그러고는 발에 채는 돌멩이를 팍팍 차면서 가버렸다. 작달막한 광대는 어쩔 바를 모르고 주뼛거리기만 했다.
“부디 이 쌀 가져가 주시오. 그저 선한 뜻으로 드리는 거요.”
내가 당부조로 말하자 작달막한 광대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나와 키다리 광대의 뒷모습만 번갈아 살피다가 급히 말했다.
“못 받겠습니다, 공주 마마. 성님, 같이 가요!”
작달막한 광대는 호랑이라도 만난 듯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저런 시건방진 것들을 봤나! 감사한 줄 모르고.”
칠보가 열불이 나는지 가슴을 탕탕 쳤다.
내 눈길이 나도 모르게 어름삐리에게 향했다.
‘이름이 광복이라고?’
광복이라는 소년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 묘한 눈맞춤이 잠시 이어졌다. 한순간 소년이 눈길을 꺾더니 밥솥 앞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장작의 불길만 유심히 살폈다. 소년의 그 모습에선 어쩐지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그 숭고함을 두 눈에 담았다.
“아씨, 아니, 공주 마마. 쌀가마는 어찌 할까요?”
칠보의 부름에 나는 소년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그냥 두고 가자. 저들이 알아서 처분하겠지.”
1650년 4월 22일,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 마당에는 무르익은 봄기운이 가득했다. 나는 가슴을 열고 싱그러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땅의 봄을 내 몸에 가득 담아 두고 싶었다.
그 사이 용상에서 일어선 임금이 어도까지 내려왔다.
“자, 이제 가마에 오르거라. 네가 오른 뒤에 나도 오르겠다.”
임금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청나라 칙사 일행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랫사람이 임금보다 먼저 가마에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전하. 명을 거, 거두어 주십시오.”
나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말을 더듬고 말았다.
“괜찮다. 넌 이제 내 딸이 아니냐. 아비의 말을 들어라.”
아비.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면서 둘레를 둘러보았다. 인정전 월대 앞에 서 있는 청나라 칙사와 역관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대로 품계석 앞에 서 있는 조선의 대신들은 한결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시샘하고, 임금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뚝 서 있는 인정전을 올려다보았다. 머지않아 인정전이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저 옹졸하고 냉정한 대신들이 계속 조선의 종묘사직을 지키고 있다면.
“어서 타거라. 늑장 부릴 틈이 없다.”
임금이 다시 한 번 나를 채근했다. 나는 임금의, 새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신들의 속이 뒤틀리게 만들고 싶었다.
가마를 타려다가 인정문을 향해 뒤돌아섰다. 나의 긴 여행에 함께해 줄 수행원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먼저 인정문 왼쪽에 서 있는 궁녀와 수모와 유모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큰절을 올리고 싶었다. 이들은 나 때문에 조선을 떠나 청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인정문 오른쪽에는 짐꾼들과 임금의 명으로 특별히 수행원 자격을 얻은 큰오라버니와 작은오라버니가 서 있었다. 이들은 나를 청에 데려다준 뒤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똑같이 예의를 갖춰 공손하게 인사했다.
“공주 마마, 이제 그만 가마에 오르시지요. 태보 대감께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합니다.”
호행사 원두표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이 여행의 조선 쪽 책임자였다. 나는 호행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청나라 칙사를 잠깐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가마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가마의 문이 닫히고, 휘장이 둘러졌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와 동시에 가마 안으로 임금의 근엄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짐은 모화관*까지 함께 가겠다. 대신들은 홍제원*까지 의순공주를 모시도록 하라. 알겠느냐?”
“예, 전하!”
“짐이 가마에 오르겠다.”
잠깐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더니, 가마가 붕 떠올랐다. 이제 정말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줄에서 떨어졌던 어름삐리의 앳된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마가 궁궐을 나왔는지 가마 안으로 백성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청나라 섭정왕과 강제 혼인을 한다지? 금림군 대감 댁에 초상이 난 거나 다름없구먼.”
“전하가 따라가실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가 봐.”
“어이구,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게 죄지, 죄야!”
흑흑 흐느끼는 소리도 흘러들어왔다. 나도 그렇게 울고 싶었다. 가마 문을 열고, 그들과 함께 울고 싶었다.
‘진짜 여행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아름다운 산천을 보고 돌아올 수 있는 여행길이라면…….’
혹시 부모님이 이 행차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애련이가……?
궁궐까지 따라오겠다는 부모님을 나는 부득부득 말렸다. 떠나는 모습을 보이기 싫으니 그냥 집에 계시라고 악을 썼다. 두 오라버니는 임금의 명으로 수행원 자격을 얻은 것이기에 막을 수가 없었지만, 부모님은 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나의 서운함을 부모님께 표현하고 싶었다. 백성을 위해 기꺼이 도르곤의 아내가 되겠다고 거듭 다짐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서운함은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깨끗이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애련이는 나를 따라와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애련이는 내게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문 앞에서 담담한 얼굴로 작별인사만 건넸다.
‘애련이는 그렇게 나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한 거겠지. 너무 슬프고 기가 막혀서 일부러 담담한 척했겠지.’
갑자기 가마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전하는 이 부끄러운 행차를 백성들에게 오래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그래서 빨리 도성을 빠져나가려는 걸까?’
몸이 흔들려서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어디선가 까치가 까악까악 울었다. 지겹게 듣던 까치 울음인데, 먼 타국으로 떠나는 날 들으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긴다던데…….’
몸이 더 크게 흔들렸다. 까치 소리도, 백성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모화관: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다.
*홍제원: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운영한 여관으로 공무 여행자가 머물렀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미시쯤 가마가 개성에 다다랐다. 사흘이면 올 거리를 한양을 떠난 지 닷새 만에 왔다. 가마 행렬은 늙은 황소의 걸음처럼 굼뜨기만 했다.
가마에서 내리니, 눈앞에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그 너머에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초가집도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예쁜 풍경에 잠깐 마음을 빼앗겼지만, 곧 궁금해졌다. 마을 어귀와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 왜 행렬을 멈췄을까.
때마침 호행사 원두표가 다가왔다.
“공주 마마, 개성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오시경에 출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시면 곧 관아로 모신답니다. 꼭 필요한 반인(伴人) 몇만 빼고 나머지는 원에서 묵을 것입니다.”
“태보 대감의 뜻이오?”
“그렇습니다, 마마.”
“역관 정명수를 불러 주시오.”
“예? 무슨 일로…….”
“불러 주시오. 그에게 당부할 말이 있소.”
오래지 않아 원두표가 정명수를 데려왔다. 정명수는 나의 부름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부르셨습니까, 공주 마마.”
“태보 대감께 전해 주시오. 나도 원에서 함께 묵겠다고. 지금껏 반인들은 민가에 맡기고, 나만 관아에서 묵는 게 가시방석에 앉는 것처럼 불편했소.”
“원에서 주무신다니요? 그러다 고뿔이라도 드시면 큰일 납니다.”
“지나친 걱정이오. 원에서 자다가 고뿔든다는 얘기는 처음 듣소.”
“공주 마마, 분부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제 곧 왕후가 되실 몸, 제가 마마를 홀대한 것을 구왕(도르곤)께서 아시면 전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치 나를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짧은 시간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다. 정명수의 말대로 관아에서 묵을 것인지, 아니면 내 고집대로 원에서 묵을 것인지.
정명수는 본래 조선 사람이다. 광해 임금 때 벌어진 심하 전투에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청의 역관이 되었다. 1619년에 일어난 심하 전투는 명과 청의 싸움이었다. 그 시절 명을 섬겼던 조선은 군대를 보내 명을 도왔다.
정명수는 조선이 아닌 청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를 신임한 황제는 황제의 뜻을 조선에 전달하는 일을 그에게 시킨다.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황제에게 무릎 꿇을 때도 그가 통역을 했다. 정명수, 지금 그는 조선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다.
나 역시 정명수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그가 조선에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집을 꺾기로 했다.
“알겠네. 내가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 그냥 관아에서 묵겠네.”
“송구합니다, 공주 마마.”
정명수의 입꼬리가 실긋 일그러졌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명수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정명수를 처음 보았던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창덕궁 선정전에서 왕비 간택을 받던 날,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 정명수라는 이름은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몰랐었다. 나는 나중에야 상궁에게서 간택에 참여했던 역관이 정명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은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머리 한쪽이 이지러진 조각달이 슬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 뭔가 알아냈느냐?”
나는 예경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급히 물었다. 예경이는 지밀*에 속한 견습내인*이었다. 답답한 궁궐 생활이 싫어서 내 시중들기를 자원한 씩씩한 아이였다. 나와 세 살 터울인데다 싹싹하고 붙임성이 있어서 금방 친해졌다.
“내일은 시전 상인들이 개성부에 세금을 내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 다른 큰일은 없다더냐?”
“예, 마마.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알았다. 고생했다. 그만 가서 쉬거라.”
“또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아차! 방금 시킬 일이 생각났다.”
예경이가 토끼눈을 뜨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설피 쉬지 말고 푹 쉬거라. 늘어지게. 알았느냐?”
“예? 마마도 참……. 짓궂기도 하셔라.”
예경이가 배시시 웃었다. 나도 그 웃음에 푸근한 미소로 답했다.
*지밀: 왕이나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 또는 각 궁전의 침실
*견습내인: 정식 내인이 되기 이전의 내인. 내인은 궁녀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호칭이다.
예경이가 물러간 뒤 한 식경쯤 지나서 작은오라버니가 찾아왔다. 나는 신중하고 예민한 작은오라버니에게 정명수의 감시를 부탁했었다.
“공주 마마,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닙니다. 등잔불이 침침해서 그렇게 보인 거예요.”
정명수 문제로 골똘히 고민하느라 내 얼굴이 어두워졌었나 보다. 나는 얼렁뚱땅 등잔불 핑계를 대며 넘어갔다.
“고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고민을 덜어드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민이라뇨. 별말씀을. 그런데 오라버니,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냥 ‘애숙아’ 하세요. 공주 마마라는 말 듣기 거북해요. 말씀도 낮추시고.”
작은오라버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마. 네 맘이 편하다면.”
기분이 왠지 씁쓸했다. 작은오라버니가 곧 나와 헤어질 일을 염두에 두고, 나의 바람대로 해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경에 도착하면, 오라버니들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네게 줄 소식을 가져왔다.”
“그래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정명수는 유시경에 혼자 이상수라는 객주에게 갔다. 이상수는 개성에서 가장 세력이 큰 객주라더라. 그런데 내가 숨어서 지켜보니, 여러 사람이 얼마씩 간격을 두고 이상수의 집으로 들어가더구나. 낌새가 이상하다 싶어 더욱 눈여겨봤는데, 그들은 모두 장사치 같더구나.”
“장사치라……. 틀림없이 장사치인가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맞을 게다. 그것도 돈 많은 거상들일 게야. 거상들은 걷는 품새에서 티가 나거든. 거드름을 피우거나 아니면 가진 것을 빼앗길까 봐 잔뜩 경계를 하지. 그리고 상인이 아니면 해가 진 뒤에 객주에게 찾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오라버니 말씀이 맞군요.”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는 걸 봐서, 뭔가 작당을 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더 알아낼 수는 없었다. 우선 너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 이리로 달려왔다.”
“잘하셨어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정명수를 어쩌려는 게냐? 말해 줄 수 없느냐?”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너는 속 깊은 아이니까 네게 해가 될 일은 안 하겠지.”
“염려 푹 놓으세요. 근데 큰오라버니는 좀 어떠세요?”
“다행히 열이 많이 내렸다. 워낙 굳센 분이라 내일 아침이면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게야.”
“마음이 좀 놓이네요. 원은 지낼 만하세요?”
“지낼 만하다마다. 방도 널찍한 게 아주 편하다. 우린 걱정 말고, 네 걱정만 해라.”
“오라버니도 참!”
나를 걱정해 주는 작은오라버니가 새삼 고마웠다. 두 오라버니가 나의 수행원이라는 사실에 힘이 샘솟았다. 내일 아침, 계획대로 일을 잘 매듭지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날이 밝기 전 나는 예경이만 데리고 원으로 향했다. 원의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산 너머에서 발갛게 동이 터올랐다.
“이리 오너라.”
문고리를 쾅쾅 두드리며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조금 뒤 원을 관리하는 향리가 잠이 덮인 눈으로 대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웬 여인네들이……. 누구시오?”
“의순공주 마마요. 당장 안으로 안내하시오!”
향리의 버릇없는 물음에 예경이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어이쿠,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몰라 뵙고. 근데 어디로 모실까요? 혹시 방에 드시려는 겁니까?”
나는 향리에게 위엄을 갖추어 대답했다.
“마당으로 안내하라.”
나는 마당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서서 마당을 네모나게 둘러싸고 있는 방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깨어난 이가 없는지 어떤 방에서도 인기척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내 눈치를 슬슬 살피고 있는 향리에게 물었다.
“역관 정명수의 방이 어디냐?”
“저기, 오른쪽 가운데 방입니다.”
“그를 깨워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예? 무, 무슨 일로…….”
“당장 데리고 오지 못하겠느냐!”
화들짝 놀란 향리가 뒤뚱뒤뚱 정명수의 방으로 달려갔다. 삐걱, 방문이 열리며 정명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정명수, 네 이놈! 개성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은 죄를 내가 벌하겠다.”
나는 일부러 정명수에게 말을 낮추었다. 그를 궁지로 몰기 위한 수단이었다.
“공주 마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장 이리 와서 무릎 꿇지 못할까.”
그 순간 정명수의 얼굴에서 잠이 확 떨어져 나갔다. 다음 순간 정명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내가 지레짐작으로 이러는 것인지, 확신에 차서 이러는 것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역시 얼치기는 아니었다.
“명을 어길 셈이냐? 오늘 나는 조선의 공주이지만, 내일은 청국의 왕비다. 한낱 역관 따위인 네가 내 명을 어기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성싶으냐?”
“가당치 않습니다. 공주 마마의 명을 어기다니요. 다만 의관을 갖출 틈을 주십시오.”
역시 정명수는 약삭빠른 인물이었다. 우선 나를 안심시키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냉큼 오지 못할까? 내 너를 곤장으로 다스리겠다.”
그제야 정명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이 소란에 방문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더 큰 소리로 정명수를 다그쳤다.
“어젯밤 개성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은 걸 다 알고 있다. 네 죄를 순순히 자백하고, 받은 뇌물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어라.”
“억울합니다. 소인, 쌀 한 톨 받은 적이 없습니다.”
“네가 백성을 업신여긴 것도 모자라 나까지 업신여길 셈이구나. 객주 이상수가 너의 악행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이래도 발뺌할 것이야!”
정명수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마침 청나라 칙사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는 정명수를 더 세차게 몰아붙였다.
“지금 네 죄를 인정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허나 끝까지 속인다면, 구왕께 네 죄를 낱낱이 고해 참형에 처하도록 하겠다!”
참형이란 말에 마침내 정명수의 기가 꺾였다. 그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진정 참형을 받겠느냐!”
“용서하십시오, 마마. 소인, 욕심에 눈이 멀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정명수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열려 있던 방들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나라 칙사는 벌레 씹은 얼굴을 했고, 큰오라버니와 작은오라버니는 흐뭇하게 웃었다. 호행사 원두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정명수를 벌하는 나의 행동으로 인해 조선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정명수의 방에서는 은 일천 냥이 나왔다. 쌀 이백 가마를 사고도 남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개성 시전은 한양 시전에 버금갈 만큼 규모가 크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거상들이 모여 거래를 하기도 한다. 조선의 국법은 시전 상인이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나라에 세금을 내도록 정하고 있다. 이 국법에 따라 개성의 시전 상인은 개성부에 세금을 낸다. 정명수는 바로 이 세금의 절반을 가로챈 것이다. 어젯밤 이상수의 객주에 시전의 조합원들을 불러 모아 자신에게 세금을 바치게 한 것이다. 시전에서 조합원들의 입김은 태풍만큼이나 세다. 이들의 눈밖에 벗어나면 어떤 장사치도 시전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정명수는 오늘 아침 개성부 유수*를 찾아갈 계획이었다. 자신이 챙긴 세금의 절반을 못 본 척 눈 감으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황제에게 말해 유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다.
관아로 돌아오자마자 예경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주 마마, 정명수가 뇌물을 받은 것을 어찌 아셨어요? 이상수라는 객주를 만나지도 않으셨잖아요. 어제 마마님은 줄곧 관아에 계셨으니까.”
“실은 나도 몰랐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 모르게 작은오라버니에게 정명수를 감시하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어제 이상수의 집에 정명수와 상인들이 모였다더구나. 개성부에 세금을 내기 전날 밤, 그들이 무얼 했겠느냐?”
“그럼 짐작으로 아신 거예요? 뇌물 받는 걸 직접 보신 것도 아닌데?”
“물론 못 봤지. 네 말대로 짐작으로 안 거고.”
“우와,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긴. 정명수가 청과 조선을 오갈 때마다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다는 소문이 자자했지 않느냐. 그러니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지. 또 실마리는 정명수 그 자가 스스로 주었어.”
“정명수가 스스로 실마리를 주었다고요?”
“그래. 어제 내가 원에서 묵겠다고 했을 때 굳이 나를 관아에 묵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때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게다가 정명수의 방심도 한몫했다. 그는 백성을 등치는 일이 습관이 된 자가 아니냐. 그러니 내가 자신을 방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야.”
“우와, 공주 마마의 치밀함에 포도대장이 울고 가겠어요. 그래도 만약 짐작이 틀렸다면 어쩌실 뻔했어요.”
“글쎄. 그에 대한 대책은 안 세웠는데…….”
“예? 참말이세요?”
예경이의 눈이 송아지 눈처럼 커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호호 웃음이 나왔다. 참 오랜만에 웃는 웃음이었다.
*유수: 도성 이외의 중요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의 관리. 개성ㆍ강화ㆍ광주ㆍ수원ㆍ춘천 등지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