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좋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큰돈 들이지 않고 쉽게 하루에 한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그때마다 작으나마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커피의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카페에 찾아가고 커피를 마시는 모든 시간, 집에서 원두를 고르고 분쇄해 핸드드립 하는 모든 과정이 다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카페에서든 집에서든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매일인 건 지금 내가 백수 상태로 여유가 많아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백수생활의 즐거움 같기도 하네요.
회사에 다닐 때에는 커피를 마신다기보다 카페인을 들이키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장거리 출근길을 달려 사무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컴퓨터 전원을 켜는 거죠. 그러고 나서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가 부팅되는 걸 보며 오는 길에 사 온 커피를 마십니다. 뜨거운 커피가 아무것도 없는 위벽을 훑는 느낌에 집중하면서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빨리 나타나길 기다리죠. 아니면 탕비실로 곧장 가서 믹스커피를 진하게 탑니다. 마시면서 바로 후회되네요. 귀찮아도 오는 길에 커피를 사 올걸 하고요. 느끼하고 달아서 영 커피 같지 않습니다. 나에게 믹스커피는 아주 고단할 때 급속으로 당분을 공급함으로써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역할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아침 빈속에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도 점심 먹고 나서 졸릴 때, 외근 다녀와서 지칠 때, 회의하면서 진 빠질 때, 야근하면서 고단할 때 또 커피를 마십니다. 커피를 안 마시는 직장인보다 하루에 한 잔만 마시는 직장인이 훨씬 드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나는 직장생활만 해봐서 직장인 얘기를 했지만 자영업의 세계도 커피 없이 돌아가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게다가 공부가 일인 학생이나 수험생들도 커피 얘기하면서 빼먹으면 서운하다고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커피는 단순히 음료의 한 종류가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활동에 수반되는 생활필수품 또는 일종의 약처럼 느껴집니다.
내 커피 생활의 시작은 고등학교 때 학교 안에 있던 자판기였습니다. 거의 매일 한 잔씩 뽑아 마셨네요. 내가 트림을 하거나 속이 안 좋다고 하면 친구들이 커피 때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종일 앉아만 있어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거라며 커피를 끊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방학 때는 집에서 인스턴트커피, 설탕, 프림을 2:2:2로 넣어 커피를 타 마셨죠. 지금 생각하니 고등학교 안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던 것과 집에서 커피 타 마시는 고등학생 딸에게 엄마가 아무 제제를 가하지 않은 점이 놀랍네요. 뭐, 옛날 얘기니까요. 대략 30년이나 전의 정말 옛날 말입니다.
어쨌든 이후로 오랫동안 인스턴트커피를 마셨습니다. 주로 커피믹스였죠. 기분에 따라 물의 양을 달리하기도 하고, 한 번에 두 봉지를 넣는 다던가 조심스럽게 설탕과 프림을 약간 걷어낸다던가 하면서 맛의 단조로움을 극복했습니다. 특히 신맛이 있는 “테이스터스 쵸이스”를 편애했고, 물을 적게 넣어서 걸쭉하다 싶도록 진하게 마시는 걸 좋아했습니다. 당시 인스턴트커피계의 양대 산맥은 맥심과 쵸이스였고, 부드러운 맛의 “맥심”을 좋아하는 파가 신맛이 나는 “테이스터스 쵸이스”를 좋아하는 파 보다 우세했던 것으로 기억되네요.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마구 늘어나던 시기에도 인스턴트커피를 주로 마셨습니다. 카페에 가서 기계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만드는 “원두커피”를 마시는 건 주로 친구를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대 앞에 스타벅스 매장이 처음 생길 때에는 그렇게 비싼 걸 누가 사 먹겠냐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자판기 커피보다 몇십 배 비싼데 과연 맛도 몇십 배 좋겠냐는 거였죠. 오래지 않아 국내외의 카페 프랜차이즈 매장이 곳곳에 생겼고 사람들은 금방 원두커피에 익숙해졌습니다. 나도 어느새 인스턴트커피보다 카페에서 마시는 원두커피가 더 좋아졌고요. 하지만 그 시절 원두커피는 그리 맛있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무난하게 마실 수 있으며 누가 만들어도 일정한 맛을 내기 위해 원두를 많이 볶아서 탄 맛과 쓴맛을 내는 커피 일색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리차, 옥수수차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탄맛과 쓴맛이 강한 그 커피를 "구수하다"며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원두커피를 즐겨 마시게 되면서부터 나는 커피에 다른 걸 넣는 게 싫었습니다. 우유나 설탕, 얼음과 같은 것들은 커피의 맛을 희석시킬 뿐이죠 커피 고유의 맛이 풍부하게 느껴지도록 농도가 진해야 좋았습니다. 그래서 커피 맛과 함께 진해지는 쓴 맛을 기꺼이 참았네요. 기계에서 커피를 추출한 상태 그대로인 에스프레소가 진짜 커피라고, 물조차 많이 넣으면 커피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탐정 포와로가 주인공인 영국 드라마를 보다가 격하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포와로와 지인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는 장면이었죠. 그중 한 사람이 미국 사람들은 커피에 물을 타서 마신다고, 커피 맛을 모른다며 비웃습니다. 그러자 포와로가 한 술 더 떠서 “미국에는 커피가 없다”라고 하는데 저는 내적으로 박수를 쳤습니다.여전히 옛날 타령이네요. 방영된 지 10년 넘은 드라마 얘기를 하고 말입니다.
어쨌든 나는 포와로와 달리 이름마저 맛없게 들리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많이 마셨습니다. 다만 주문할 때마다 물을 원래 넣는 양의 반이나 3분의 2쯤, 또는 컵을 들고 손가락으로 여기까지만 넣어달라고 최대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며, 요청 혹은 부탁 혹은 간청을 했죠. 다들 알았다고 하고는 그냥 아메리카노와 별 차이 없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카페에서 일한 적이 있는 친구의 친구 말이, 자기가 만약 그런 주문을 받는다면 그래도 그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늘 하던 대로 만들겠다는 거였습니다. 이후엔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옵션을 달지 않았죠. 네, “롱 블랙”이 있습니다. 아메리카노보다 물을 적게 넣는 커피. 이름도 훨씬 맛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카페 메뉴에 롱 블랙이 생긴 지는 몇 년 안 됐고 지금도 대부분의 카페엔 아메리카노만 있습니다. 대신 “진하게” 옵션이 가능하죠.
카페를 많이 다녀보니 촉이 옵니다. 공간만 봐도 여기 커피는 연하겠구나, 싶은 카페가 있죠.진한 아메리카노가 안 될 것 같으면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곤 했습니다. 특히 식후엔 거의 에스프레소였죠. 입 안에 남아 있는 음식 맛을 이겨 내고 부른 배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식곤증을 단숨에 날려버리기에 에스프레소가 딱이니까요. 또 옛날 얘기를 하자면, 카페들이 막 생겨나던 시절엔 에스프레소를 주문할 때마다 양이 굉장히 적은데 정말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고 “마셔봐서 안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해야 했습니다. 양이 너무 적어서 거기에 물을 탄 게 아메리카노라고 설명해도 못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아, 옛날 사람들이 왜 자꾸 “나 때는……, 예전에는……” 하는지 알 것 같네요. 얘기를 하다 보면 옛날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때가 없었으면 지금도 없을 테니 너그럽게들 이해해주시길.
다시 커피 얘기로 돌아가서, 에스프레소였죠, 회사생활 중에 내가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 걸 보고 따라서 마신 동료가 딱 두 명 있었습니다. 한 명은 에스프레소가 맛있다는 나의 말에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독주라도 마시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겨우 다 마시더니, 다음날 나에게 혀가 마비된 느낌이었고 잠을 못 자서 괴로웠다며 원망을 쏟아내더군요. 다른 한 명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게 멋있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여자 친구에게 보내며 으쓱하고는, 잔에 입을 살짝 댔다가 역시나 너무 쓰다고 인상을 쓰더니 잔을 내려놓고 다시 손대지 못했습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네요.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주인공이 에스프레소에 각설탕을 하나 넣어서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 창밖을 바라보며 마시죠. 분명히 멋있는 화면이지만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감독이 그 장면에 대해 설명하기를, 사실 주인공은 창밖을 보는 게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고 맛은 잘 모르면서 멋있어 보이려고 굳이 에스프레소를 마신 거라고 했습니다. 내가 느낀 우스꽝스러움이 맞았네요. 그리고 에스프레소는 허세의 아이템이 되기도 하나 봅니다.나도 딱히 에스프레소의 맛을 제대로 알아서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독하다 싶을 만큼 진한 맛과 빠르게 느껴지는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좋았던 거지. 음악은 락 밴드만 듣고 드라마는 연쇄살인마 나오는 범죄 수사물을 제일 좋아하고, 색도 눈 아프도록 쨍한 걸 좋아하는 등 내 취향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커피에 대한 내 취향도 그 일관성 안에 있는 거겠죠.
로스터리 카페, 스페셜티 싱글 원두, 핸드드립 같이 듣기만 해도 맛있을 것 같은 용어들이 익숙해진 지 십 년이 채 안 됐습니다. 그 와중에도 주야장천 아메리카노 진하게, 아니면 에스프레소를 외쳤는데 맛있는 커피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네에 살게 되면서 달라졌습니다. 4년 전에 서울을 떠나 이사 온 우리 동네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좋은 카페들이 많습니다. 로스터리 카페들도 꽤 있어서 원두도 취향껏 골라서 살 수 있고요. 무언가를 좋아해서 많이 접하다 보면 거기에 대한 취향이 생기죠. 무엇에 관해서든 취향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나는 값도 저렴하고 파는 곳도 많은 커피를 좋아하니 커피에 대한 취향을 가져야겠다고, 그러면 사는 게 좀 더 즐겁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커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어서 예전에는 안 마시던 종류의 커피들을 다양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진하지 않다고 싫어하던 핸드드립 커피와 아이스커피도 마시고, 커피가 아니라 커피 맛 나는 우유라고 생각했던 카페라테도 마시고, 시시때때로 제 철을 맞는 원두를 다양하게 맛보면서요. 커피는 원래 산성분이 있어서 신맛이 난다는 것이, 원두의 산지와 품종에 따라 확연하게 맛이 다르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심지어 같은 생두인데 로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고 같은 원두도 추출 레시피에 따라 맛이 다르죠. 우유가 들어가도 충분히 커피 맛이 좋을 수 있고, 얼음이 커피 맛을 더 좋게 할 수도 있네요. 에스프레소 역시 잘 만들면 쓰지 않다는 걸, 그냥 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커피에 대한 취향은 그저 고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커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오히려 내가 아는 것만 고집했던 거죠. 취향이라는 게 어느 하나만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커피든 각기 다르게 맛있네요. 맛있는 커피가 더 많아진 거고 나는 그만큼 더 즐거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