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기억나?
《빛보다 먼저 생긴 언어》
죽변항 등대. 해 질 녘의 색은 아이들의 그림자를 붉게 늘인다.
방파제 위로 기울어진 햇빛이 콘크리트 벽을 캔버스 삼아
아이들의 몸짓을 진짜보다 더 선명하게 남긴다.
그림자는 거짓이 없다. 아이들은 말이 없고, 그저 손짓한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척—
다른 아이가 웃으며 똑같이 손을 올린다.
말은 없지만, 그 안엔 다 있다.
“같이 놀자”
“너 기억나?”
“우린 여기 있어.”
그들만의 수화, 그들만의 언어.
말보다 빠른 감정이 손끝에서 빛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멀찍이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 암호 같은 손짓이 궁금해서.
척은 뭐고, 그다음 아이의 답장은 또 무슨 뜻일까.
둘째 아이의 손이 올라가는 속도, 셋째의 웃음 섞인 몸짓.
나는 방파제에 기대어 조용히 그들의 언어를 해독한다.
그러다 문득,
나도 모르게 그들의 손짓을 따라하고 있었다.
이건 관찰이 아니라 동화였다.
나는 그 손짓 속으로 빠져들었다.
빛보다 먼저 온 그들의 언어 속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냥 그림자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유년의 언어이고,
나에게는 잊고 지냈던 감정의 파문이었다.
죽변항의 저녁이 그 언어를 더 오래 남겨주었다.
사라질 듯 말 듯,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