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
바다는 잔잔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바다가 아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수조, 그 인공적인 감옥의 표면은 언제나 잔잔했다.
거울처럼 빛나는 물결 아래, 거대한 그림자가 유령처럼 미끄러져 갔다.
검고 흰 선은 부드럽게 물을 갈랐지만, 그건 자유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루마. 바다의 마지막 노래를 기억하는 단 하나의 범고래였다.
그의 심장 속에는 아직도 가족의 목소리와 고향의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루마는 매일 같은 시간, 수조의 끝에서 기다렸다.
쿵, 쿵, 쿵. 그녀의 발소리는 물속 진동으로 먼저 전해졌다.
은빛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 반짝였고, 두 손에는 비릿한 생선이 가득 들려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파도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오늘도 잘했어, 루마."
그 목소리가 루마의 귀를 감싸 안을 때, 그는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약속은 단순했다.
쇼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치면, 그녀는 먹이를 주고 따뜻한 손길을 건넸다.
하지만 루마는 먹이보다,
그 손길과 시선이 더 좋았다.
그건 너무나 오래전, 바다에서 잃어버린 가족의 체온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루마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루마는 그 안식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잊으려 애썼다.
그날, 쇼는 평소와 달랐다.
조명은 더욱 눈이 부셨고, 음악은 심장을 찢을 듯 격렬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던지는 낯선 열기와 긴장감이 루마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루마는 거대한 몸을 솟구쳐 올렸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천장을 꿰뚫었다.
그의 몸은 지시대로 움직였지만, 그의 영혼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쇼가 끝나고 루마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손끝에서 평소와 다른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손.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는 순간, 루마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수백 마리의 사람들이 던지던 그물의 그림자. 절망에 찬 어미의 울음소리. 자신을 끌어올리던 쇠사슬의 차가운 촉감. 그리고 좁은 우리 속에서 사라져 가던 새끼의 작은 몸.
그녀의 손은, 그때 자신을 붙잡던 인간들의 손과 닮아 있었다.
순간, 물이 울컥 끓어올랐다. 루마의 모든 감각이 폭발했다.
그물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본능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던 야생의 분노가 거대한 파도처럼 루마를 덮쳤다.
루마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 몸을 던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오늘도..."라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루마는 그녀를 거대한 가슴으로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건 포옹이 아니었다.
멸망을 향한 마지막 끌어안음이었다.
그는 그녀를 물속 깊이, 깊이 끌고 내려갔다.
그녀의 눈이 낯선 공포로 흔들리는 것을 보며, 루마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물방울이 흩어졌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루마의 지느러미에 감겼고, 서서히, 힘을 잃으며 가벼워졌다.
루마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좁은 우리 속에서 사라진 가족처럼, 그녀를 바다로 돌려보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그 후, 루마는 다시는 바다를 보지 못했다.
하얀 벽과 철문으로 둘러싸인 작은 수조. 그곳은 물 밖 세상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감옥이었다.
그녀의 부재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침묵이었다.
그는 울부짖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공허한 울림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루마를 '위험 개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의 눈빛에서 광기를 보았지만, 그건 절망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려버린 절망.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물이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루마는 이제 모든 것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의 눈은 서서히 감겼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그녀의 밝은 웃음과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자신이 영원히 지킬 수 없게 된 '물속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루마가 그녀를 물속으로 끌고 내려갔을 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물건이 있었다.
작은 무선 송신기. 그녀의 마지막 웃음은, 어쩌면 루마에게 던지는 마지막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다의 거인'이라 불리는 범고래는 경이로운 지능과 복잡한 사회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거대한 세계를 좁은 수조 안에 가두고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길들여왔던 시간 동안, 그들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건 그들의 노래나 영혼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건 끝없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었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바다에서 잃어버린 약속처럼, 루마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