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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의 유령, 해귀 1부 — 물은 기억한다

달이 없는 밤이었다.

by 마루

달이 없는 밤이었다.
조선의 바다는 그날따라 유난히 검었다. 파도는 낮게 숨을 고르고 있었고, 불붙은 화살들이 하늘을 가르며 지나갔다. 수면 위에서는 전쟁이 소리를 냈지만, 수면 아래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바다는 늘 그렇게, 인간의 소란을 깊이 묻어두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물속으로 몸을 맡겼다.
숨을 멈춘 것이 아니었다. 숨의 방향을 바꾼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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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바다는 고향 말라바르와는 달랐다.
내가 자란 곳의 바다는 태양의 체온을 품고 있었고, 파도는 어머니의 손처럼 느리게 흔들렸다. 그러나 조선의 바다는 차가웠다. 뼈마디까지 파고드는 냉기가 몸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바다를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남는 법을 가장 빨리 가르쳐 준 것도, 가장 조용히 나를 받아준 것도 바다였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해귀(海鬼)**라 불렀다.
바다의 귀신.
검은 피부와 이질적인 눈, 물속에서 오래 사라질 수 있는 몸. 그들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이름도, 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가.

명나라 군영에서 처음 계약을 맺던 날, 제독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내 손과 폐를 보았고, 물속에서의 시간을 계산했다. 은자 오십 냥.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 그게 내가 받은 전부였다. 그날 이후 나는 병사가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기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존재, 다만 결과로만 남아야 하는 사람.

수면 아래에서 나는 적선의 밑바닥을 찾았다.
삼나무 판재는 거대한 생물의 배처럼 매끈했고, 조개와 해초가 들러붙어 있었다. 배 위에서는 웃음소리와 술 냄새가 흘러내려왔다. 그들은 발밑의 어둠을 믿었다. 바다는 늘 아래에서부터 무너진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숨은 폐 속에 접어 두고, 심장은 북처럼 느리게 울렸다. 손끝으로 판재의 틈을 더듬고, 준비해 둔 불씨를 심었다. 물이 상처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통증은 없었다. 차가움이 이미 나를 마비시키고 있었으니까. 검게 그을린 피부는 밤바다와 하나가 되어, 나를 더욱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불씨를 당기는 순간, 나는 방향을 바꿨다.
위가 아니라, 더 깊은 아래로.

잠시 뒤, 바다가 울부짖었다.
불길이 배를 삼키고, 물기둥이 하늘로 솟았다. 비명과 목재가 부러지는 소리가 뒤섞여 밤을 찢었다.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승리의 기쁨은 없었다. 대신 설명할 수 없는 허무함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이 전쟁에서 나의 몫은 늘 그런 것이었다. 흔적은 남기되, 존재는 남기지 않는 것.

그때였다.
전투가 끝난 뒤, 잔해만 떠다니는 바다 위에서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뱃머리에 홀로 서 있었다. 푸른 철갑을 두르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바람에 깃발이 펄럭였고, 그 위에는 ‘이(李)’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조선의 수군통제사, 바다와 맞서 싸우는 사내.

나는 수면 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과 파도에 묻혀, 보이지 않아야 할 위치였다. 그러나 그 사내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괴물처럼 보지 않았다. 두려움도, 호기심도 없었다. 그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알고 있음.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경례를 했다.

그것은 명령도 신호도 아니었다.
바다 아래에서 숨죽여 싸운, 이름 없는 존재에게 보내는 묵직한 예였다.

그 순간, 내 심장이 크게 울렸다.
은자 오십 냥보다, 그 어떤 치하보다도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되지 않아도, 불리지 않아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쟁이 끝난 뒤, 나는 다시 사라졌다.
명나라 장교의 일지에는 ‘행방불명’이라는 말이 남았고, 조선의 기록에는 단 한 줄이 적혔다. 해귀가 적선을 불태웠다. 그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없었다.

그러나 바다는 알고 있었다.
누가 그 밤을 건넜는지, 누가 숨을 빌려 싸웠는지.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
차가운 조선의 바다 밑을 유영하는 꿈을. 불타는 배와 가라앉는 소리들, 그리고 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푸른 철갑의 사내를.

역사는 침묵하지만,
바다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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