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심해의 유령, 해귀 3부 — 바다의 증언

오래된 꿈을 꾸었다.

by 마루

전쟁이 끝났을 때,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길이 사라지고, 포성도 멎었지만, 파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바다는 다시 제 숨의 리듬으로 돌아갔다. 인간의 전쟁은 언제나 그렇게, 바다에게는 잠깐의 소음에 불과했다.

나는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
명나라 군영에서는 나를 찾지 않았고, 조선의 항구에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계약은 끝났고, 값은 이미 계산된 셈이었다. 살아 돌아온 용병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였다. 전쟁은 늘 다음 도구를 찾을 뿐, 지난 도구를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조선의 바다를 떠돌았다.
이름 없는 섬의 해안에서 밤을 보내고, 낮에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심지 않는 잠수, 쫓기지 않는 어둠. 처음으로 숨이 목적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바다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적의 그림자도, 명령도 없었다.

어느 날, 나는 해녀들을 보았다.
그들은 바다로 들어가기 전 짧은 숨을 고르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맡겼다. 물 위로 떠오를 때, 그들의 숨비소리는 파도와 닮아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섰다. 아비가 숨을 고르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시대도, 언어도 달랐지만, 숨을 바다에 맡기는 방식만은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꿈을 꾸었다.
말라바르의 바다, 햇빛 아래 반짝이던 수면, 그리고 아비의 손.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다만 깊은 곳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바다는 데려간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기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며칠 뒤, 나는 마지막으로 조선의 바다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적선도, 불씨도 없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내려가는 것. 숨을 빌리고, 돌려주는 것. 아비가 가르쳐 준 그 길의 끝을 확인하는 것.

물은 차가웠고, 어둠은 깊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바다는 여전히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폐가 비워지고, 심장이 느려지자, 세계는 다시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값도, 이름도, 계약도 없는 상태. 오직 숨과 물만 남았다.

그때, 위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푸른 철갑의 사내는 없었고,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다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지켜본 증인. 바다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나는 더 내려갔다.
올라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사람들은 말했다.
해귀는 사라졌다고.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기록에는 남지 않았고, 소문만이 파도처럼 흩어졌다. 어떤 이는 내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고, 어떤 이는 조선의 바다 어딘가에 묻혔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다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밤이 되면, 파도는 가끔 낮게 운다.
그 소리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고, 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그것은 숨 때문이다. 한때 이름 없이 싸웠던 자들, 기록되지 않은 손길들, 전쟁의 밑바닥에서 세상을 떠받치던 존재들의 숨.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는 증언한다.

당신이 바다 앞에 서서,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온다면,
그것은 파도가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못한 숨 하나가
당신 곁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숨은,
오늘도 조용히,
물을 기억하게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4yksv94yksv94yks.png


작가의 말 — 역사적 사실 정리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해귀(海鬼)’**는 전적으로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 이름과 개념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공식 기록 속에 실제로 등장한다.

1) “해귀(海鬼)”란 무엇인가

‘해귀’는 조선 후기 사료, 특히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조선 조정이 명나라 군대 내부에 존재했던 이국적 병사를 지칭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기록에 따르면 해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피부색이 검고


눈동자가 유난히 도드라지며


곱슬머리 같은 이질적인 외형을 가졌고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묘사는 조선 사회가 익숙하지 않았던 외래 병종을
‘귀(鬼)’라는 표현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현대 연구와 정리에서는 이들을


명군에 편입된 포르투갈 계통 병사 혹은 그 영향권 인력으로 이해되는 존재
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관련해 가장 공신력 있게 정리된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한 한국학·디지털 인문학 자료(실록위키 등)**가 참고된다.

2) “포르투갈 이방인이 데려온 검은 피부 용병”과의 연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포르투갈 세력과 직접적인 접점을 갖고 있었다.

이 역사적 배경 때문에 한국의 여러 기사·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포르투갈 세력을 통해 유입된 인력 중


아프리카계 혹은 인도양권 출신 병사들이


명군의 일부로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


다만 이는 사료에 명시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정황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대중적 해석에 가깝다.
따라서 원문 사료(실록 등)에 기록된 내용과
후대의 해설·추정은 명확히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그림으로 언급되는 시각 자료

‘해귀’의 존재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시각 자료로는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가 있다.

이 그림은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일부 해설에서는 좌측 하단에 검은 피부를 지닌 병사가 ‘해귀’로 표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 해석은

국가기관 해설



주요 언론 기사
등에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어 왔으나,



역시 명확한 인물 식별이 가능한 1차 사료 증거라기보다는, 시각적 해석에 근거한 설명이라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4) 이순신과의 직접적인 연결에 대하여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만큼, 분명히 밝힌다.


현재까지의 사료 기준으로
‘해귀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직접 활동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귀’ 관련 기록의 중심은

조선 조정(선조) 기록



명군 내부의 병력 구성에 대한 보고
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과의 연결은


동시대의 전쟁 공간 안에서 존재가 인식되었을 가능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신중한 해석이다.


따라서 본 작품에서 묘사된
이순신과 해귀의 조우, 혹은 인식의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이다.

다만 그 상상은,
이순신이 기록과 일기 속에서 보여준
이름 없는 기여와 보이지 않는 역할까지 인식하던 태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맺으며

〈심해의 유령, 해귀〉는
확정된 영웅을 추가로 만들어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기록의 가장자리에 스쳐 지나간 이름


한 줄로만 남았거나, 아예 남지 못한 존재들


그리고 전쟁의 밑바닥에서 싸웠던 사람들


을 조용히 호출하기 위한 역사 픽션이다.

사실은 사실로 남기고,
공백은 문학으로 잇는다.

그 경계 위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심해의 유령, 해귀 2부 — 숨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