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호대서, 슬로프 아래에서 만난 시간의 문장

by 마루

풍호대서, 슬로프 아래에서 만난 시간의 문장

겨울의 에덴벨리 스키장은 늘 현재형이다.

속도는 빠르고, 풍경은 명확하며, 목적은 단순하다. 올라가고, 내려오고, 다시 올라간다. 리프트의 규칙적인 진동과 스키가 눈을 가르는 소리는 이곳이 얼마나 ‘지금’에 충실한 공간인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슬로프를 내려온 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커브 하나를 더 돌았고, 속도를 줄였고,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곳과 전혀 다른 시간대에 속한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안내판도 없고, 설명도 없는 돌 하나.

낡았고, 마모되었고, 무엇보다 말이 없었다.

1. 읽히지 않는 것에 대한 집요한 시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읽히지 않음’은 종종 신호가 된다.

너무 잘 보이는 것은 설명으로 끝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질문을 남긴다.

비석의 표면은 세월에 닳아 있었고, 글자는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관광지 어디에나 붙어 있는 친절한 해설문은 없었다. 이 돌이 무엇인지, 왜 여기 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무성의함이, 이 돌을 풍경에서 분리해냈다.

마모는 우연이 아니다.

마모는 오래 있었다는 증거다.

2. 단서 하나, 그리고 자료집

비석 상단에 새겨진 몇 글자는 간신히 판독이 가능했다.

명확하진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의 제목’처럼 보였다.

사진을 확대하고, 다시 보고,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현장을 떠나 책으로 향했다.

양산 지역 향토 자료집.

행정 자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아두지 않으면 사라졌을 이야기들.

그 안에서 한 문장이 눈에 걸렸다.

風乎臺序. 풍호대서.

3. 풍호대, 바람을 논하던 자리

풍호대는 조선시대 이 지역 선현들이 모여

시를 짓고, 바람을 이야기하고, 학문을 나누던 장소였다.

‘대(臺)’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고 사유를 쌓아 올리던 자리였다.

그리고 ‘서(序)’.

누군가가 그 풍경과 뜻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는 의미다.

지금은 스키장으로 기억되는 이 땅이,

한때는 바람의 방향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논하던 공간이었다는 사실.

그 기록의 흔적이 바로, 아무 설명도 없이 서 있던 그 돌이었다.

4. 왜 설명은 사라지고, 돌만 남았을까

우리는 늘 친절한 안내에 익숙하다.

QR코드, 요약문, 지도, 정리된 문장들.

하지만 이 돌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 채 남아 있다.

글자는 닳았고, 문장은 끊겼고, 의미는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긴다.

어쩌면 이것이 기억이 살아남는것이다


風乎臺序



風, 바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흐르고, 머물지 않으며, 지나간 뒤에 감각만 남기는 것.

乎, 어조를 여는 숨.

묻고, 부르고, 감탄하게 만드는 사이의 여백.

의미를 단정하지 않고, 여지를 남기는 소리.

臺, 높은 자리.

올라서 바라보는 곳,

몸보다 생각이 먼저 서는 자리.

序, 시작의 글.

기록의 문을 여는 말,

앞에 놓인 풍경과 뜻을 정리해 건네는 문장.

합하면,

바람을 논하던 높은 자리에서

그 의미를 열어 두고 시작한 기록.

말하려 하지 않고,

정의하지 않으며,

다만 바람처럼 두고 간 글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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