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비워진 몸, 비워진 그림
누드를 처음 찍었을 때를 떠올리면,
솔직히 말해 호기심이 먼저였다.
사진가에게 ‘누드’라는 장르는 늘 묘하게 열려 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금지된 것을 허락받은 느낌,
여성의 신체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룰 수 있다는 착각 같은 것.
나 역시 그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의 촬영을 지나며
그 호기심은 금세 다른 감각으로 바뀌었다.
누드는 찍는 사람이 대단해서 성립되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서는 사람,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델의 태도가 전부를 결정했다.
전날부터 속옷을 입지 않아 몸에 자국이 남지 않게 관리하는 것,
자기 몸의 각도를 정확히 알고
어떤 포즈에서 어떤 선이 살아나는지 스스로 판단하는 감각,
카메라 앞에서 쭈뼛거리지 않는 당당함.
누드 모델은
몸을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몸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사진가들이 오히려 더 어색해한다.
프레임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몰라 망설인다.
그럴 때 오히려 모델의 태도가
현장을 정리한다.
“괜찮아요.”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워요.”
그 순간,
사진가와 모델 사이에는
묘한 합의가 생긴다.
이건 소비가 아니라 작업이고,
노출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합의.
그 경험은
‘여성의 몸’이라는 대상이
얼마나 쉽게 오해되고,
얼마나 자주 단순화되는지를
현장에서 체감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 본 한 화가의 누드 작품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그 화가는 양얀이었다.
중국에서는 잘 알려진 화가지만,
누드를 주로 다룬다는 이유로
대중적으로 폭넓게 소비되는 작가는 아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누드는 늘 설명을 요구받는 장르다.
그의 누드는
도발적이지 않았다.
관능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
몸은 분명히 그려져 있는데,
욕망의 방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은 집요했지만,
집착은 없었다.
마치 그에게 여성의 몸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 그림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가
자연스럽게 그의 이력을 찾아보게 됐다.
성공한 화가,
늦은 결혼,
젊은 아내,
두 아이.
그리고 출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모든 걸 내려놓았느냐고 묻는다.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다시 떠올리면
조금 다른 질문이 생긴다.
이 사람은
애초에 무엇을 붙잡으려 했을까.
누드를 그린다는 건
몸을 소유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몸이 얼마나 덧없고, 순간적이며, 통제 불가능한지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다.
사진에서든, 그림에서든
몸은 결국 사라진다.
프레임 안에 남는 건
형상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평생
형상을 그렸지만,
점점 형상에서 멀어지는 그림을 남겼다.
산은 흐려지고,
인물은 사라지고,
여백은 넓어졌다.
어쩌면 출가는
돌발적인 이탈이 아니라
그가 오래전부터 연습해 온
‘비움’의 연장이었는지도 모른다.
누드를 통해
몸을 비워내는 연습을 했고,
그림을 통해
형상을 비워내는 연습을 했고,
마침내 삶에서도
같은 선택을 했을 뿐.
나는 아직도
누드를 특별히 옹호하지 않는다.
누드는 여전히 오해받기 쉬운 장르고,
쉽게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다.
누드는 욕망의 장르가 아니라, 통제의 장르다.
그리고 진짜 위험한 건
몸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몸을 단순하게 보는 시선이다.
그 화가의 삶이 옳았는지,
그의 선택이 책임 있었는지는
지금도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중국의 한 전시장에서
그의 그림 앞에 서 있던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어떤 예술가는
끝까지 그리기 위해 붓을 드는 게 아니라,
언젠가 내려놓기 위해
그토록 오래 그려왔는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