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이야기

by 마루

​[나레이션] 담양, 만장이 펄럭이던 길을 기억하다

​출장길에 마주한 담양의 밤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고요해서, 이제 겨우 저녁 8시를 넘겼을 뿐인데 도시는 벌써 거대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더라고요. 낯선 시골길을 헤매다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던 맥주집 하나를 찾아 들어가 갓 튀겨낸 통닭에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여독을 풀어보는데, 가게 한쪽 벽면에 걸린 낡은 사진들이 자꾸만 시선을 붙잡더군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옛 마을의 풍경과, 이제는 커다란 나무들이 호위하는 그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두 모녀의 다정한 모습까지...

어쩌면 이곳 주인장도 나처럼 셔터를 누르며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동질감이 들었습니다.

​그 여운을 안고 찾아든 중앙 모텔의 하룻밤은 참 묘한 온도로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방 안에는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위풍이 감도는데, 바닥은 전기장판으로 지글지글 끓어올라 등허리를 뜨겁게 달궈주니...

그 차갑고도 뜨거운 부조화 속에서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방이 떠올라 한참을 뒤척였죠. 윗공기는 입김이 나올 듯 시리고 아랫목은 살이 델 듯 뜨거웠던 그 옛날의 잠자리, 매일같이 온도가 정교하게 맞춰진 아파트에서 살다가 마주한 그 불편한 포근함이 오히려 저를 깊은 상념 속에 잠기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진 속에서 봤던 그 길을 직접 걸었습니다.

지금은 메타세쿼이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이 나무들이 뿌리 내리기 훨씬 전, 이 길은 전혀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을 테지요. 나무 대신 초가집들이 길을 열고, 그 끝에는 고즈넉한 절이 자리 잡고 있었을 그 시절...


바람이 불 때마다 불교의 만장이 하염없이 나부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 장엄한 풍경이 뷰파인더 너머로 겹쳐 보였습니다.

​담양(潭陽), 맑은 연못 위로 따뜻한 볕이 내리쬐는 곳이라는 그 이름처럼 지금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내 마음속엔 자꾸만 만장이 펄럭이고 초가집 위로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옛날의 담양이 스며듭니다. 하이 오렌지 필름의 렌즈에 담긴 건 오늘의 길이지만, 제가 기록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그 길 아래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