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건조기 위에 놓인 나 미래모습

인화되지 못한 문장들의 기록

by 마루

카메라 건조기 위에 놓인 나

— 인화되지 못한 문장들의 기록

2030년 미래의 나 요즘 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바디와 렌즈들은 카메라 건조기 안에 있다.

정해진 습도와 온도, 제조사가 권장한 가장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기계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완벽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배터리는 분리되어 전압을 잃었고,

렌즈 알에는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0’의 상태다.

하지만 나는 전원을 켜지 않는다.

건조기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뷰파인더의 어두운 사각형 대신

깜빡이는 커서의 가느다란 선을 응시한다.

셔터가 열리고 닫힐 때의 날카로운 파열음 대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손끝에 남는

서걱거리는 마찰음을 감각한다.

카메라를 들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오히려 더 자주 ‘찍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아직 사진사인가.

사진사라는 호칭이

검지 끝에 걸린 셔터의 무게로만 증명되는 것이라면


포트폴리오도, 최근 작업도,

새로 인화한 프린트도 없다.

하지만 오래 시선을 훈련해온 사람일수록 안다.

사진은 기계로 찍히지만,

사진사의 감각은 기계 밖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장면을 본다.

현관 앞에 비뚤어져 놓인 운동화의 각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채 멈춰 있는 그 각도에는

누군가의 하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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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진가이자 감정기록자입니다. 사람들의 말보다 더 진한 침묵, 장면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와 노트북를 늘 곁에 두고 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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