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내 어릴 적 기억이 겹쳐졌다

이블장

by 마루

나는 날씨 좋은 날, 글을 시작한다.

전날 비가 많이 왔다. 뉴스에서는 곳곳의 침수 피해 소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늘 아침, 넓게 펼쳐진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공기는 여전히 푸석지근했고, 나는 우산동 복계천 개천을 따라 걸었다. 물비린내가 묻어나는 공기, 젖은 돌계단, 빗물이 남긴 윤기까지 그날은 여전히 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계단 위에 올라서면 보이는 우산옥, 설렁탕집의 간판이 반짝였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침식사를 위해 자리를 잡았을 때,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책 속 그림에는 알루미늄 이불장 위에 놓인 카세트 테이프가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그 그림을 찍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단순한 사진 한 장으로는 모자랐다.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만약 저 장면을 실사로 만든다면, 어떤 앵글이 좋을까.

머릿속에 내 어릴 적 기억이 겹쳐졌다.

광택이 번쩍이는 알루미늄 이불장, 계절마다 꺼내던 이불의 촉감, 그리고 그 위에 놓였던 라디오 카세트.


그건 분명 삼성의 옛날 카세트 테이프였다.

밤이면 나는 그것을 들으며 이종환의 **〈밤을 그리운 그대에게〉**를 녹음하곤 했다.

리셋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의 촉감이 생생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작은 소리, 그리고 흘러나오던 노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게 세상의 모든 밤을 내 테이프 안에 가두고 싶어 했다.


지금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 게 아니다. 대신, 언어의 셔터를 눌렀다.

사진 대신 문장을 찍고, 상상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냈다—이 글을.


작가의 말


어떤 기억은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 대신 마음속에 오래 비치는 그림자가 있다.

나는 그 그림자를 언어로 찍고, 다시 꺼내어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 우산옥에서 본 한 장의 그림은 내 어린 날의 밤을 다시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늘, 이렇게 다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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