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버릿돌의 숨비소리

숨비소리

by 마루

​소설: 버릿돌의 숨비소리

​1. 멈춰버린 캔버스, 도망쳐온 바다

​캔버스는 우윳빛 침묵이었다.

명화는 붓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서울의 화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그녀의 영감은 말라비틀어진 미역줄기처럼 바스러져 있었다. 붓을 가져다 대도 아무런 색도, 형상도 태어나지 않았다.

하얀 무(無)의 공포. 그것이 명화를 삼키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도망쳤다.

혹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기억의 품으로 돌아왔다.

​구룡포.

​가파른 해안 절벽 아래, 바다는 검게 끓어오르며 하얀 거품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거친 바다 위에, 아주 오래된 이름처럼 묵직하게 떠 있는 갯바위 섬 하나. 보리돌이었다.

​어릴 적, 비릿한 미역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엄마는 명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명화야, 저 바다 윤슬 속에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들이 숨어 있단다.

언젠가 네가 갈 길을 잃었을 때, 저 빛이 너를 불러줄 거야.”

​그때 명화는 엄마의 말을 미신이라 여겼다.

바다는 빼앗아만 가는 존재였다.

아빠를, 그리고 엄마의 목소리를. 하지만 지금, 캔버스 앞에서 길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건, 그 아득한 엄마의 주문 같은 말 한마디뿐이었다.

명화는 물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보리돌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2. 앵글에 담긴 낯선 허기, 감 potato_princess의 멈춤

​‘감자공주’라는 가벼운 별명 뒤에 숨은 진경의 내면은 무거웠다.

그녀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셔터를 터뜨렸고, 사진은 쌓였으며, 화려한 평가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의 사진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이미지가 복사된 듯 비슷했고,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지독한 번아웃이었다.

​진경은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무작정 내려왔다. 지도가 안내하는 곳이 아닌,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그렇게 멈춰 선 곳이 구룡포 보리돌 앞이었다.

​진경은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앵글 속 보리돌은 그저 거대한 돌덩이일 뿐이었다. “잘 찍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바다를 바라보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보리돌 아래 갯바위에 멈췄다.

​그곳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명화였다.

낡은 치마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쪽 뺨을 가리고 있었다.

명화는 갯바위 틈새에 돋아난 생미역을 손으로 뜯어, 망설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질겅질겅. 짭조름한 바다의 맛을 온몸으로 씹어 삼키는 듯한 그 행위.

​진경은 순간 묘한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지독한 허기,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붙잡고 싶어 하는 처절한 몸짓처럼 보였다.

진경의 손이 먼저 반응했다. 허락도 없이, 셔터가 눌렸다. 찰칵.

​그 소리에 명화가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쏠렸던 머리카락이 걷히며, 물기 어린 갈색 눈동자가 진경의 앵글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경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깊은 슬픔과 경계심, 그리고 낯선 공감이 그녀의 메마른 내면에 균열을 일으켰다.


​3. 미역 향기 속에 피어나는 숨비소리

​진경은 당혹감을 감추고 명화에게 다가갔다. 도촬에 대한 사과가 먼저였다.

​“저기… 미안해요. 제가…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어서.”

​명화는 진경을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입으로는 미역을 씹으며, 갯바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어요. 죄송해요.”

​진경의 진심 어린 사과에도 명화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그녀는 갯바위 틈에서 뜯어낸 싱싱한 생미역 한 줄기를 진경에게 내밀었다.

​“이거 드셔 보시겠어요?”

​느닷없는 미역 공세에 진경은 당황했다.

​“네? 왜… 생미역을 저한테…?”

​명화는 그제야 진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엷은 웃음기가 서렸다.

​“이곳 미역은 보릿고개 시절, 우리 마을 사람들을 살린 생명의 미역이에요. 아주 짭짤하고, 향긋하죠. 비릿한 바다 냄새 속에 숨겨진, 진짜 삶의 맛이랄까.”

​명화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묵혀둔 이야기들이 배어 있었다. 진경은 명화가 내민 미역을 받아들었다.

손끝에 닿는 미역의 감촉은 차갑고 단단했다. 코끝을 찌르는 짙은 비릿함과 알싸한 미역 향기.

​진경은 명화가 했던 것처럼 미역을 입에 넣고 씹었다. 짭조름한 바닷물이 입안 가득 퍼졌다. 거칠고 질긴 식감 너머로, 낯선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것은 명화의 아픈 과거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저 보리돌 근처에서 돌아가셨어요. 폭풍우가 치던 날, 미역을 따러 가셨다가….”

​명화의 기억은 늘 그 장면에서 멈췄다.

거대한 파도, 아빠의 비명, 그리고 영원한 사라짐. 그날 이후, 엄마는 말을 잃었고 바다는 목소리를 얻었다.

​숨비소리.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겨우 올라와 짧게 내뱉는, 간절한 숨. 명화는 그 소리가 싫었다. 살아있다는 증거인데, 너무나 위태롭고 처절해서.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배를 몰았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바다로 들어갔다.

명화는 언덕 위에서, 매일 둘을 기다렸다.

바다는 누군가를 데려가지만, 남겨진 사람의 마음속에 더 오래 머문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알았다.


​4. 폭풍우 속의 데자뷰,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윤슬

​대화가 끝나갈 무렵, 명화가 진경에게 물었다.

​“작가님은… 왜 여기 오셨어요?”

​진경은 잠시 보리돌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도망쳤어요. 화려한 사진작가라는 껍데기에 갇혀, 진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매일 똑같은 이미지를 찍어내는 기계가 된 것 같았거든요.”

​진경의 솔직한 고백에 명화 역시 마음을 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바다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갑자기 낮아지고, 파도가 거칠게 들끓기 시작했다. 폭풍우였다.

명화는 본능적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무서움보다 익숙함이 앞섰다.

아빠를 앗아간 그 파도가,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낚시배가 폭풍우 속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경은 카메라를 들었지만,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그 장면은 기록이 아니라, 명화의 아픈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데자뷰 같은 순간이었다.

진경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명화를 향해 소리쳤다.

​“명화 씨! 안 돼요! 위험해요!”

​하지만 명화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엄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바다의 거친 파도를 이겨내려 사투를 벌였다.

할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폭풍우가 지나간 후,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보리돌 전망대.

​명화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말했던 그 ‘소중한 것’을 캔버스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파도는 여전히 거칠고 바다는 여전히 깊었지만, 그 위에 빛이 있었다.

윤슬. 엄마의 영혼이 깃든, 그 숨겨진 빛.

​진경은 그 옆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명화의 그림 속에 담긴 윤슬을,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명화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이거… 찍어도 돼요?”

​명화가 물었다. 진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미 찍힌 것 같아요.”

​어쩌면, 사진보다 먼저 기억이 찍히는 순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5. 보리돌의 노래, 하나로 이어지는 숨

​두 여자는 보리돌 전망대 끝에 나란히 서 있었다. 해 질 녘, 바다는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은빛 윤슬로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비릿한 바다 냄새 속에, 보리돌이 품고 있던 짭조름하고 향긋한 미역 향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명화와 진경의 코끝에, 그 생명의 향기가 듬뿍 스며들었다.

​먼바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에 백도 섬이 점처럼 떠 있었다.

그 섬과 보리돌, 그리고 두 여인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웅장한 앵글.

​앵글 속, 진경의 어깨에 메어 있던 카메라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명화의 낡은 치마자락이 물결치듯 흔들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렸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거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데자뷰가 되어 겹쳐졌다.

​보리돌은 누군가에게는 굶주림을 견디게 해준 생명의 바위였고, 누군가에게는 사라진 사람의 영원한 자리였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하는 이유가 되었다.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앞에 선 사람은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가끔, 그 이야기들이 미역 향기 속에 서로를 만나, 하나의 숨처럼, 숨비소리처럼 이어진다.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뒤로 빠지며, 거대한 보리돌과 백도, 그리고 바다 바람 속에 선 두 여인의 뒷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냈다. 버릿돌의 숨비소리는, 그렇게 바다 윤슬 속으로 아득히 퍼져나갔다.

오늘 구룡포의 거친 바람을 뚫고 보리돌 앞에 서서, 제 마음속에 일렁이던 문장들을 갈무리해 봅니다.

​[작가의 말]

길 끝에서 만난 비릿한 삶의 문장들

​처음엔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막막하게 끊긴 길 위에서 멀리 보리돌을 바라보며, 저곳까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일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려던 찰나, 항구를 가로질러 바다의 심장부로 곧장 연결된 샛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예기치 않게 열리는 새로운 기회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차를 몰아 도착한 보리돌 앞, 저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습니다.

계획에도 없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켜고, 쏟아지는 바다 바람을 마이크 삼아 혼자 주절주절 이야기를 뱉어냈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는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무질서한 소음들 사이에서 오늘 소설의 첫 문장이 싹을 틔웠습니다.

​역시 글은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그리고 차가운 바닷물이 튀는 피부로 쓰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현장에서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비릿한 미역 향기와 살결을 파고드는 눅진한 습도, 그리고 눈앞을 어지럽히는 하얀 윤슬...

이 모든 감각이 제 안에서 명화와 진경이라는 숨결로 되살아났습니다.

​서재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었던 그 '디테일'들—미역을 씹는 소리, 바람에 쏠리는 머리카락의 각도 같은 것들은 오직 그 길 끝에 직접 서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길을 헤매다 발견한 그 샛길처럼, 이 소설이 여러분의 마음속 막막한 풍경 너머로 이어지는 작은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보리돌의 미역 향기가 여러분의 오늘에 조금이나마 짭조름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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