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 까다로운 테스트를 피해 갈 수 없다.
"둘 다 좋아.." 잠시 눈치를 살피던 아이는 짧은 고심 끝에 선택지에 없는 창의적인 답변을 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 판단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우문현답이다.
아이는 성장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깨닫게 된다. 양쪽 모두의 편을 들고도 문제가 되지 않은 경우는 '엄마아빠 둘 다 좋아' 뿐이라는 것을.
한국 사회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지대에 머물러 있으면 많은 불이익을 겪는다. 갈등에 휘말리기 싫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려고 하다가는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 있다. 공평무사한 태도는 양다리를 걸친 회색분자로 의심을 받는다.
양쪽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려는 욕심 또한 중간지대만큼이나 안전하지 못하다. 적을 만들지 않으려면 근질거리는 입을 잘 다스려야 하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까지 해야 한다. 가끔 착한 사람들이나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이 섣불리 이러한 시도를 하다가 그동안 쌓아 온 이미지를 한 번에 실추시키기도 한다.
차별과 반목, 대립과 갈등은 세계 어느 지역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편 가르기에 집착한다. 학교, 직장, 각종 모임, 지역 사회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없이 네 편 내 편으로 나눠진다. 편이 나눠지면 그때부터 온갖 트집거리를 만들어 서로 헐뜯으며 끊임없이 공격한다.
이러한 편 가르기 습성은 어릴 때부터 길러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애들이랑 놀면 안 된다고 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착하지 않다는 선입견까지 주입시킨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길러진 인싸(인사이더)와 아싸(아웃사이더)의 편 가르기 습관은 지역, 젠더, 세대, 빈부 등을 거쳐 직장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편 가르기가 만연한 양극화 사회에서 중립 지대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한쪽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는 포기한 한쪽을 적으로 간주한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같은 편 내에서 충성심을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 편을 공격한다. 일제 강점기간 일본 순사들보다 더 악랄했던 친일 앞잡이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소신과 용기가 없는 중립은 양쪽 모두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마치 양쪽 모두로 부터 환영을 받지 못해 무풍지대로 피신해 있는 사람들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때로는 양쪽을 모두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처럼 비칠 수도 있다.
이러한 국민들의 편 가르기 비극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언론과 정치판이다. 언론에 세뇌당하고 정치인들의 편 가르기를 학습한 국민들은 이 두 집단이 입맛대로 이용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분열되어 있다. 편과 편 사이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 채워져 있다.
언론과 정치판에는 과거 중간 지대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중간 지대를 버티지 못하고 어색한 색상의 옷을 걸치고 다른 색깔의 옷을 공격하는데 선봉에 섰다. 지식과 명성으로 무장한 중간 지대의 사람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얼마나 극단적이고 파괴적으로 변하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편 가르기가 심한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참 지도자들은 대체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회 통합을 위해 용서와 화합을 외치고, 때로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양쪽을 동시에 비판한다.
이분법적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런 스타일의 지도자를 싫어한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것을 거짓이라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왕처럼 여겨왔던 인물들을 서슴없이 비판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인데?" 중요한 것은 이 한마디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잘게 쪼개어 저울에 매달아 입맛대로 색깔을 입힌다. 지도자는 특정 세력을 옹호한다는 원색적 비난을 받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로부터 황당한 공격을 받다가 제풀에 사라진다.
예전에는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사회 지도자들이 가끔 나타나 어둠과 혼돈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이 되어 주었다. 통찰과 인품을 겸비한 이들은 시대의 혼란과 분열을 치유할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스승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선배 스승들의 쓰라린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을지 모르는 스승들께 얘기하고 싶다. 지금이 적기라고. 지금이 진짜 지도자들이 침묵을 깨고 나타날 때라고. 만약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나타나고 싶다면, 그런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중간 지대에 머물며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공감과 비공감뿐인 세상에서 슬며시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이들은 바람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용기 있는 사회 지도자가 다시 출현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어울리지 않은 색상의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색깔을 입고 세상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꿈꾼다. 시대의 등불이 되어 줄 스승들의 출현과 중간 지대에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그날이 몹시 기다려지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