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역사를 읽을 때면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4권으로 구성된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기원전 공화정 시대 이탈리아 반도 내 부족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생생하고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사실은 공화정 시대가 로마 역사에서 귀족과 평민 간 권력 대결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대였음에도 연례행사처럼 되어 버린 크고 작은 전쟁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병력 동원과 물자 보급이 가능했을까? 잦은 전쟁으로 인한 물적, 인적 손실에 따른 충격과 피로를 흡수하기 위한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냈을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로마는 수많은 전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마치 전쟁을 위해 존재했던 국가처럼 로마 역사의 상당 부분이 전쟁과 관련한 승리와 패배, 영광과 굴욕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수백 년간 지속된 전쟁은 로마 군인들의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고, 전쟁에서 승리를 할 때마다(심지어 패배할 때 조차도) 로마가 신들의 특별한 비호를 받는 영원불멸의 국가라는 강한 믿음과 자부심이 로마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성스러운 신전 건설과 극진한 의식으로 신들을 로마에 오래 묶어두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로마를 특별히 사랑한 전쟁의 신 마르스를 비롯하여 여러 신들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로마는 들판과 계곡, 도시와 바다에서 수많은 전쟁을 통해 역사상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로마의 전쟁 역사는 크게 공화정 시대의 전쟁과 제정 시대의 전쟁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공화정 시대의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 내 부족들을 평정한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를 벗어나 지중해 세계와 유럽 일대를 무대로 펼쳐졌던 공화정 후반기의 '정복 전쟁'으로 다시 나눠진다. 제정 시대의 전쟁은 제국의 국경선이 어느 정도 정비가 되고 팍스 로마나가 정착되면서 주로 변방 야만족들의 침입에 대한 방어 위주의 전쟁이었다.
로마 건국 초기 이탈리아 내에는 오래전 정착해 있던 토착 부족들 외에 에트루리아처럼 지중해 동쪽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알프스산맥과 3면의 바다에 둘러싸여 외부로의 진출이 쉽지 않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여러 부족 국가들 간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로마는 이탈리아 내 중앙에 위치한 데다가 교역에 유리한 항구를 끼고 있어 주변 부족들의 집중 타깃이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와 주변 섬들을 완전히 제패할 때까지 이웃 부족들은 로마를 선망과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며 침략과 방어를 반복하였다. 그중에는 일찌감치 로마의 파워와 권위에 굴복하여 로마의 일원으로 편입된 부족들도 있었고, 일부 부족들은 로마와 느슨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마 내부적으로는 기원전 509년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귀족 계급의 원로원과 평민 계급을 대표하는 호민관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다. 왕정 시대처럼 절대 권력자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정치권력이 분산된 가운데 원로원을 중심으로 1년 임기의 선출직 집정관 두 명이 국정을 책임지다 보니 일사불란함보다는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원로원과 포룸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평민 계급을 대변하는 호민관들은 귀족 계급이 독점하는 권력을 나눠가지기 위해 각종 개혁 법안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시민들을 선동하였고, 반면에 원로원은 로마의 발전과 외침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는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맞섰다. 이러한 로마의 내부 갈등과 혼란은 때로는 이웃 부족들로 하여금 로마가 곧 망할 것 같다는 오판을 불러일으켜 로마로 진군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원로원 입장에서는 호민관들이 주장하는 개혁 법안들에 대한 표결을 어떻게든 부결 혹은 지연시킬만한 명분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 인근의 부족이 무장봉기하여 국경 지역을 침범한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를 전시 비상 체제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평민들이 로마 시내를 떠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호민관들이 제출한 혁명적인 개혁 법안들의 표결을 미룰 수가 있었고, 당면한 원정 전쟁으로 인한 분주함과 동요 속에서 잊히기를 바랐다.
로마를 위협할 정도의 침략도 많았지만, 때로는 인근 부족들 간의 분쟁이나 국경 부근 농작물 정도의 약탈에 대해서도 원로원은 국가의 위기로 부풀려서 동원령을 서둘러 선포하는 경우도 있었다(공화정 시대는 상설 부대가 아닌 유사시 징집하는 시민군으로 운영).
반면, 호민관들은 전쟁이 임박하여 실질적인 위협이 가해지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법안 표결을 볼모로 병력 동원을 가로막았다. 두 계급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민회의 표결로 동원 여부를 결정하였는데, 적군이 로마 성벽 앞까지 밀어닥치는 위급한 순간에는 원로원이 독재관을 임명하여 강제로 동원령을 발동하기도 하였다.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할 경우 얼핏 생각하기에 평민들은 항상 호민관 편에 설 것 같지만, 국가가 정말 위기 상황일 때는 평민들이 원로원 편에 서서 표를 행사하였다. 평민들이 판단하기에 위기에 처한 조국과 가족을 지킨다는 의무감과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기꺼이 종군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의명분과 의무감도 항상 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빈번한 전쟁과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의 상심과 경제적 고통은 시민계급 대부분 가정에서 흔한 일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병사들이 무기와 장비를 자비로 장만하다 보니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쌓여 있던 불만이 참전 거부나 전쟁 중 반란이라는 극한 행동으로 폭발되기도 하였다.
호민관들은 시민(병사)들의 이러한 고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시민 계급의 권력을 확장하였고, 의무만 강요받던 병사들에게 복지(국고에서 무기와 장비 부담)와 보상(급여, 사망 지원금, 토지 지급)에 대한 개혁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내부적으로 이러한 두 계급 간 정치적 대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쟁이 거듭될수록 군인들의 전투력과 명예가 높아지고 있었다. 고대 로마 시민들의 자부심과 사명감은 건국 초기부터 다른 부족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만약 시민들이 원로원과 호민관들의 권력 다툼에 휘둘려 로마 사회가 분열되었더라면, 로마 스스로 무너졌거나 이웃 부족들에게 쉽게 정복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로마 시민들은 신들의 은총을 낭비하지 않았고 영원불멸의 시민답게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로마를 떠나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장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독기와 애국심이 동시에 일어났을 것이다. 또한, 장교들과 기병대까지 포함한 귀족 계급의 장군들, 평민 출신의 보병들은 오랜 병영생활과 생사를 건 전투들로 서로 끈끈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때로는 병사들이 우유부단한 사령관에게 전투 개시를 먼저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 직속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처벌을 감수하고 집단행동까지 감행하였다.
승리를 맛본 병사들은 더 많은 승리를 갈구하였다. 원로원이 강제 동원령을 내리지 않아도, 호민관들이 병력 동원을 거부해도 승리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승리의 영광과 전리품은 신과 국가에 받치고도 사령관과 병사들을 '전우'로 묶어줄 만큼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전우애는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하여 제정 시대 로마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했던 원동력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가들과 학자들이 역사적 고증과 뛰어난 상상력을 동원하여 훌륭한 명저들을 남겼다.
나의 어설픈 상상력을 조금 보태자면 로마는 그들이 가진 약점과 그들이 겪은 불행을 그들이 가진 장점 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동력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로마 역사를 읽으면서 한 번씩 눈을 감고 상상 속으로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