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최강의 군사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뛰어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시너지 효과 덕분이었다. 병역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인식 또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다. 로마 사회에서 병역은 참정권(명예)과 공직(출세)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공화정 시대 집정관은 전투 사령관 역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제정 시대에는 황제가 유사시 최전선에서 군대를 직접 통솔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위에 언급한 요인들 외에 병사들의 전투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전리품이었다. 역사가들은규모가 작은 전투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으로남겼지만, 약탈과 전리품에 대한작가적 개입(논평)은 꺼리는 편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가 패배한 나라의 비군사적 자산까지도 파괴하거나 약탈하였다. 심지어 비전투 민간인들까지 포함되었다. 잔혹한 행위였지만, 승리자의 입장에선 자신과 가족,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정당한 대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선식 행사에 약탈품을 전시하는 것은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승리의 결과를 홍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고, 시민들의 입대 지원을 유인하는 효과도 있었다.
로마의 약탈품 지급 방식은 다른 시대나 국가에 비해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파격적이었다. 약탈한 전리품의 일부는 국고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군단 내에서 계급과 공적에 따라 배분 되었다. 전리품 지급이 불합리하거나 사령관이 과도하게 차지할 경우에는 원로원에 고발할수 있었다. 고대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투명하게 전리품이 지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작농이나 도시 일용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전리품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만큼 매력적인 동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적의 진영과 도시를 약탈하는 것을 허락한다. 단 여러분은 전투에서 과감하게 앞장설 것이고 약탈하는 것만큼 전투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해야 한다"
기원전 약 350년경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한 연설 중 일부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 내 부족 국가들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챙길 수 있는 전리품이 제한적이었다. 부족 국가들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부유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하더라도 약탈할 수 있는 품목들은 무기와 장비, 군수품, 농작물과 가축 정도였다.
때로는 약탈품 없이 승리의 영광만을 안고 로마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끝까지 저항한 도시를 점령한 경우에는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파괴하였고, 로마와 악연을 만들지 않았던 부족이 항복한 경우에는 로마 시민으로 편입될 기회가 있었다.
병사들에게는 약탈품 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전리품은정복 지역의 토지를 할당받는 것이었다. 이 법안을 제출한 것은 당연히 호민관들이었고, 원로원은 더 당연히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귀족 계급은 지역이 어디든 토지를 병사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싶지 않았고, 평민들이 부유해지면 로마의 신분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시민들이 정복된 지역으로 떠나게 되면 로마 시내 생산 인구가 감소하고 그로 인해 영원불멸의 도시의 위상이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완강하게 병력 동원을 거부하는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토지 지급 법안에 동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이슈는 이후에도 수백 년간 로마 정치권에서 가장 민감하고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로마 시민권이 확대되고 부유층이 늘어나고 토지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이 문제는 다양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르는 장군들 입장에서는 병사들의 사기와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토지 지급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원로원은 군대가 자칫 일개 장군의 사당화가 될 수 있다는 이유를 하나 더 보태어 반대 입장을 고수하였다.
공화정 말기 무렵에는 승리의 전리품이나 퇴역 군인들의 보상 명목으로 토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났고, 일부 퇴역한 군인들은 식민지 내 토지를 지급받아 현지 여인과 결혼하여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퇴역 군인들을 통해 식민 지역의 로마화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내 부족 국가들을 모두 평정하고 멀리 떨어진 낯선 지역으로 정복이 시작하면서 약탈품의 규모와 품목들이 크게 달라졌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포로들을 대량으로 약탈할 수 있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금광, 신전의 황금, 상류 계층의 귀금속, 저택과 대규모 농장, 이권 사업 등의 값비싼 약탈품들을 챙길 수 있었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정복지에서 획득한 약탈품 중 일정량을 국고에 납부하고 나면 나머지는 사령관이나 총독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두둑하게 챙겨줄 정도의 지휘력과 미덕을 겸비한 장군들은 원로원이 경계해야 할 만큼 병사들과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군인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은 이집트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터키와 중동 일부 지역이었는데, 당시에는 로마를 기준으로 동쪽 지역은 서쪽 지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였다. 반면에 춥고 궁핍한 데다가 덩치 큰 야만족들을 상대해야 하는 유럽 지역은 모두가 기피하는 지역이었다.
공화정 후반기 마리우스는 한때 로마의 최고 권력자였는데 출발은 그저 평범한 장군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에스파냐(오늘날 스페인) 식민지에 총독으로 파견 근무 중 그곳에서 대규모 금광을 발견하는 바람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국고에 받치고 병사들에게 넉넉하게 나눠준 황금은 몇 년간 채굴한 양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할 정도였다. 별 볼일 없는 가문의 마리우스는 여러 번의 굵직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적과 막강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로마 정계에 진출하였고, 높은 귀족 신분에다 미모를 겸비한 카이사르 고모와 결혼까지 하면서 일약 로마의 일인자로 등극하였다.
마리우스 외에도 로마의 많은 장군들이 목숨을 건 전투와 정복의 대가로 로마 시내 쾌적한 언덕에 대저택을 보유하였고 원로원 내 명당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 또한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 오랜 기간 누적된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한꺼번에 청산할 수 있었고, 막대한 군자금은 루비콘 강을 건넌 후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사후에는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천문학적 유산을 남겼다.
로마의 장군들은 애국심보다 더 강력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거칠고 위험한 미지의 땅으로 떠났고, 병사들 또한 부족한 애국심은 승리 후의 보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메꿀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로마의 팽창은 오로지 부와 사치의 획득이라는 목적에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사를 저술한(대략 기원전 20년경에 저술) 공화정 말기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가 이전 시대 의무감이 투철했던 군인들과 본인이 살던 시대의 군인 정신을 비교하면서 한 말이었다.
영원불멸의 나라, 로마를 지켜주는 여러 신들의 가호는 전장 어디에나 따라다녔다. 명예와 사명감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전리품이라는 동기까지 보태지면서 로마 군단은 더 이상 매력적인 전리품을 약탈할 수 없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발휘되는 인간 본연의 탐욕이 국가의 이익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설계된 로마의 시스템에 대해 신들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