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울 게 없는 나에게도 자신 있게 자랑할 만한 한 가지가 있다. 한국 꼰대들 중에 아내가 배꼽을 잡고 쓰러질 정도로 웃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그 희박하고도 특이한 종자에 포함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내만큼 자주 웃는 것은 아니지만 까칠하기로 유명한 아들 녀석이 아빠의 유머에 반응한다는 것도 내가 내세울 만한 무기다.
유머의 종류는 다양하고 사람들의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단어 조합이나 유머 시리즈를 암기해 리플레이하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패턴이 뻔하고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흐름을 바꾸어 버리는 반전과 반격, 공격당하는 상대까지 유쾌하게 만드는 해학과 풍자, 웃음을 넘어 감동과 교훈까지 전해지는 의미심장한 농담.. 이러한 유형들이 내가 추구하는 유머 코드다.
이러한 유머는 유교 문화나 권위적 분위기가 여전한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유통되기 어려운 영미식 유머 코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수준 높은 유머 랠리를 보고 있으면 웃음마저 잊고 감탄만 연발하게 된다. 특히, 미국 정치인들의 유머는 그들의 국력과 맞먹는 수준이다. 미국인들에게 유머는 생활의 일부이고 하나의 풍습이 되어 버렸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영미식 유머에는 얼굴의 근육뿐만 아니라 오감까지 자극하는 유쾌함, 한바탕 웃고 나면 사라지는 웃음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아있는 중의적 여운, 때로는 좌중을 뒤흔들어 놓는 촌철살인의 짜릿한 통쾌함이 있다. 이러한 유머는 남을 흉내 내거나 단기간의 연습으로는 자연스럽게 구사하기가쉽지 않다. 어느 정도 타고난 감각이나 오랜 연습을 통해 몸속에 유머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아래는 유머감각을 키우기 위한 내 나름의 마인드리셋 방법 들이다.
먼저, 유머감각을 키우려면 잘 웃어야 한다. 생산자가 되기 전에 먼저 소비부터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인드와 삶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상대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이 있어야 웃음도 저절로 나온다. 잘 웃는 감각이 생기면 웃기는 감각도 덩달아 생기기 시작한다.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에 꽂혀 있거나 편협된 관점과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늘 심각해 보이고 걱정거리뿐이다. 비교 분별심에서 벗어나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유머 소재들이 곳곳에 넘쳐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말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미소를 지어준다. 적절한 추임새는 상대의 말을 더 재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조미료 역할을 해준다. 이러한 행동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묻어난다. 곤경에 처해 있거나 말주변이 없어 버벅거리는 사람에게는 용기를줄 수 있다.
화해가 필요하다면 가벼운 농담을 던져보자. 먼저 화해를 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면 상대의 체면을 높여주고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유머는 솔선수범이다. 긴장되고 서먹한 대화, 딱딱한 회의나 강연을 시작할 때 가벼운 농담 한 마디는 말하는 사람과 청중 모두의 긴장을 풀어준다. 혹시 내 농담이 썰렁하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설령 웃음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가상한 노력을 인정할 것이다.
'차일드 퍼블릭(Child Public)'이라는 말이 있다.어른이지만아이처럼부끄러움이 많아 대중 앞에 서기를 꺼려하는 한국 사람들의 특징을 일컫는 말이다.지나치게 긴장하거나 쭈뼛거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남들에게 자칫 뭔가 잘못한 게 있거나 핸디캡이 있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사람들 앞에 서기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가 실추될까 봐두려워하는 것이다. 웅크리고 위축된 마음과 두려움을 던져 버리고 당당한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유머감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억지로 웃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유머감각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욕심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들이 웃으면 유머가 되는 것이고, 웃지 않으면 그냥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는 것이다.억지로 웃기려고 하면 스텝이 꼬인다.
세계적으로 품질 좋기로 소문난 이란의 양탄자에는 일부러 구석진 곳에 찾기 힘든 흠을 하나씩 남겨 놓는다고 하는데, 그 흠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페르시아 장인들은 일부러 그런 흠을 남김으로써 신의 작품이 아닌 인간의 작품임을 천명하고 인간적 겸손함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뭔가 약간 부족한 듯하면서 겸손해 보이는 모습이 사람들을 웃게 한다.
유머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연기력과 절제력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배꼽 잡고 넘어가더라도 가벼운 미소만 짓고 있어야 한다. 농담을 할 때는 다소 능청스러울 정도로 실제 상황인 것처럼 리얼한 표정을 지어야한다. 유머감각의 반 이상은 연기력이다.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면 논쟁이 되고 싸움이 된다. 내 말이 아무리 맞아도 일단 진흙탕 싸움이 되면 도매금 취급을 당한다. 이때는 손해를 볼 각오를 하고 한 발짝 물러서야 한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유머로 응수할 줄 알아야 한다. 이때 상대를 빈정거리거나 인신공격하는 농담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양보와 손해를 만회할 기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숙성된 복수가 더 짜릿하다.
유머를 잘 구사하는 사람은 대화의 핵심과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안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가 치고 들어갈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이때 킬링 멘트를 던지면서 상대와 좌중을 웃음으로 장악해 버리는 것이다. 유머리스트는 순발력, 통찰, 풍부한 아이디어, 열린 마음, 다양성, 여유, 관찰과 집중, 언어적 감각, 적극성,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인드, 배려와 존중 등의 감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엄숙하다. 늘 필요한 말과 정확한 말만 하려고 한다. 논리적 주장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으려고 한다. 항상 이기려고만 하고 조금만 불리하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몇 년 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위기를 겪으면서 무려 3년간이나 유머감각 상실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위기에 따른 충격과 마음의 상처로 유머감각에 심한 손상을 입었던 것이다. 어쩌면 유머감각을 영원히 되찾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절망에 빠졌었다. 그때 비로소 유머감각이 내 삶에 있어서얼마나 소중한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위기가 지나가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유머감각이 회복되었지만 왠지 전성기만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