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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Aug 28. 2022

비 내리는 밤에 펼치는 요정들의 한판 승부

잡초와의 전쟁


화단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요정 하나가 밤이면 악령들로부터 화단을 지켜주고 있다. 요정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비가 내리는 밤이면 인근 숲속과 계곡에 있는 요정들을 화단으로 불러 모은다.


그렇게 모인 요정들은 마치 축제라도 여는 듯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재미난 놀이를 한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쪽은 화초 편에서, 다른 한쪽은 잡초 편에서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각자 그룹이 맡은 식물들을 빠르게 키운다. 더 많이 키운 쪽이 이기는 것이다.


빗방울에 반사되어 다양한 색상으로 반짝거리는 요정들의 화려한 움직임이 분주하게 일렁거리며 화단을 밝힌다. 빗소리와 요정들의 율동에 잠을 잊은 식물들도 덩달아 흔들거린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어느덧 그치고 아침 화단은 하루 전과 완연하게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다. 밤새 요정들의 매직쇼로 폭풍 성장한 화초들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진녹색의 잎사귀에 붙어 있는 빗방울을 아쉬운 듯 비스듬하게 떨어뜨린다.


어제까지 한낮의 열기에 비실거리며 축 처져 있던 국화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꼿꼿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늦게 파종한 황화 코스모스는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어제까지 듬성듬성 보이던 화단의 바닥을 완전히 다 가려버렸다.

넓어진 잎들은 차광막이 되어 화단 지면의 수분을 오래도록 유지하여 게으른 정원사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비가 내린 다음날 잡초 더미에 묻혀버린 아프리카 봉선화


여기까지만 보면 화초 편 요정들의 승리 같지만, 화초들 바로 옆에는 잡초 편 요정들이 더 깜짝 놀랄만한 일을 저질러 놓았다. 어제까지 흔적도 없던 잡초들이 거의 다 자란 상태로 화초들의 비좁은 틈새를 헤집고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아무래도 잡초 편 요정들의 장난기가 발동하여 게임의 규칙을 어기고 잡초들을 통째로 옮겨 심어놓은 모양이다. 요정들이 속성으로 키웠다고 우기지만 하룻밤 사이라고 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크기다.  




가끔씩 내리는 단비는 수돗물을 퍼 나르는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에 화초들을 폭풍 성장시킨다. 부드럽게 촉촉해진 뿌리는 땅속의 영양분을 훨씬 더 잘 흡수하여 줄기와 잎을 튼튼하게 만든다.


빗물에 포함된 풍부한 영양분은 화초와 잡초를 가리지 않는다. 자연의 관대함과 오묘함에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버들강아지풀에 점령당한 코스모스


텃밭이나 화단을 가꾸다 보면 여름 내내 잡초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소일거리로 화단을 가꾸는 정원사는 항복을 할지 말지 가끔씩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


잡초는 생명력과 번식력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질기고 강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화초 바로 옆에 붙어서 자라면 유리하다는 것까지 파악할 정도로 진화되어 있다.


화초 주변에는 가끔 영양제와 살충제가 충분히 뿌려진다는 것과 잡초를 성질대로 뽑다가는 화초까지 덩달아 뽑히는 것을 걱정하는 초보 정원사가 화초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잡초를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고 있는 내 모습을 맞은편 숲에서 짓궂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잡초 편 요정들을 상상해 본다. 이제 그만 항복하라는 속삭임이 화단까지 내려와 귓전을 맴돈다.


언젠가 비가 내리는 밤에 잡초 편 요정들과 화단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한판 승부를 걸어 보려고 한다. 화초를 건드리지 않고 잡초를 가장 많이 뽑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화단 주인 자리를 뺏기더라도 내가 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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