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학원농장에서 만난 가을
끝없이 이어진 들판. 한때 눈부시게 하얗던 메밀꽃은 이제 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있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속 장면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달빛 아래 은빛 파도처럼 출렁이는 그 풍경을. 하지만 드라마 도깨비에서 나왔던 메밀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메밀꽃은 이미 절정의 시간을 지나 있었다. 하얀 꽃잎은 바람에 실려 떨어지고, 그 자리에 연약한 줄기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흩어진 흔적 속에서 나는 여전히 「메밀꽃 필 무렵」의 문장을 느꼈다.
허생원과 동이의 그림자가 메밀밭을 따라 걷는 듯, 우리의 발자국도 그 길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여름의 열기와 비의 흔적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가을은 조용히 문을 열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메밀밭을 적셨다. 촉촉이 젖은 흙냄새가 들녘을 감싸고, 바람은 그 냄새를 실어 우리에게 건넸다.
비에 닦인 하늘은 흐릿하면서도 투명했다. 들판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축제가 끝난 뒤 풍경은 고즈넉했다. 꽃길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도 풍경이 되었다. 소란스럽지 않은 가을이 고창 학원농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진 의자 위에서 물방울이 투명한 구슬처럼 반짝였다. 지나간 시간들이 그 위에 잠시 쉬어 가는 듯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우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오라고. 분홍빛과 자줏빛이 섞인 꽃잎들이 흙길을 따라 리듬을 맞추듯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가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키 작은 해바라기들이 고개를 들어 남은 햇살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해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든 해바라기. 하루 종일 해를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 모습은 잃어버린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의 몸짓이었다.
해를 바라보는 일이 곧 삶이자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내 저 버릴 수 없는 간절한 마음.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란 어쩌면 끝없는 간구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태우면서도 그 간절함을 멈출 수 없는 마음.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서 있듯, 우리 또한 그렇게 누군가를, 혹은 삶을 향해 늘 서 있다.
미플러스 포 네 여자의 여행은 언제나 웃음으로 시작해 사색으로 끝난다.
오늘도 그랬다. 풍경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아득한 시간을 건너온 거 같은, 마치 이 순간마저도 꿈인 듯한 시간들이었다.
매 순간이 감사했다. 매 시간이 소중했다. 한적한 고요 속에서 마음은 한없이 맑아졌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의 풍경이 천천히 멀어졌다. 회색빛 하늘 아래 들녘은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메밀꽃은 졌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계절이 순환하고 있었다. 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계절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메밀꽃이 진 자리에 가을이 피었다. 오늘 하루, 흩어진 꽃잎 하나에도, 잔잔히 흐르는 바람에도 마음이 머물렀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가을이 그렇게 왔다.
<깨달음 한 줄>
매번 생에 감사해. 피고 지는 모든 순간이, 결국 나를 살아 있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