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지고 있었다

소리없이, 조용히

by 담서제미

가을은 지고 있었다. 담양 덕경수목원으로 향하는 길, 차창 너머로 흩날리던 계절의 끝자락이 어느새 깊은숨을 쉬고 있었다. 길을 달리던 우리는 느닷없이 외쳤다.


"와, 눈이다!"


순간 차 안에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것은 겨울의 첫눈이라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너무 희미했다. 어쩌면 눈이라 믿고 싶은, 싸락눈 한 자락. 늦가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하늘과 맞닿은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먼저 겨울을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플러스 포 네 여자는 올 한 해도 서로에게 기대어 끝까지 달려왔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반평생을 버텨낸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는 인생의 굴곡처럼 깊게 스며든다. 그래서일까. 가을이 저만치 가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 떠나려는 뒷모습처럼 아릿하게 느껴졌다.


수목원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더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미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아직 반쯤 남은 황금색 치마를 간신히 붙잡고 서 있는 은행나무들. 그 두 모습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마치 한 생을 지나온 사람 같았다.


어떤 이는 이미 다 내려놓았고, 어떤 이는 여전히 붙들고 있는. 어떤 모습이든 결국 시간 앞에서는 모두 더없이 정직했다. 시간만 다를 뿐 남은 것은 가을을 보낸 겨울이 올뿐이다.


바닥에는 금빛 융단이 깔려 있었다. 바람에 스친 잎들이 만들어낸 은행나무의 카펫.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그 소리는 언젠가 우리도 한때 찬란히 빛났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땅 위에 흩뿌려진 금빛은 바로 조금 전까지 나뭇가지에서 생명이었다가, 지금은 발끝 아래 기억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그 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통하고 있었다. 수목원 입구 근처에서 작은 바람이 불었다. 남아 있던 은행잎 서너 장이 조용히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저 잎사귀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곧이어 어떤 따뜻한 마음이 뒤따랐다.


'떨어진다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간 함께 걸어온 우리의 시간들이 그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길처럼, 퇴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취업을 하고, 누군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우리가 계절마다 변했듯, 나무들도 해마다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떨어진 잎은 한때의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금빛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은행잎을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보았다. 얇고 가벼운 노란 잎은 마치 오래된 우리의 추억 같았다. 빛나고, 바스러지고, 다시 흩어지는 그 모든 순간이 한 장의 잎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잎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나도 이 잎처럼 좋았던 시간을 차분히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다시 새 잎을 틔울 용기를 품고 싶다고.


다시 차에 오르며 바라본 하늘은 어느새 겨울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조금 전 싸락눈 같은 하얀 점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것은 계절의 신호였을까, 아니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축복하는 작은 인사였을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가을이 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시작의 문턱에 서 있었다.


<깨달음 한 줄>

떨어지는 것 같아도, 삶은 언제나 다음 빛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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