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잘 자자
잠이 쏟아졌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피로가 바닥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벽 네 시, 내 놀이터가 있는 식탁 위, 공기는 따스했다.
머리 위 조명만이 어둠 속에 작은 섬처럼 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올렸다. 첫 문장을 눌러써 내려갔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새벽의 적막을 깨트렸다. 세상마저 잠든 시간, 오직 나만이 깨어 흐르는 생각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새벽이라는 시공간은 고독과 동시에 기이한 기쁨을 주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세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그 텅 빈 틈 사이에서 글은 가장 순수한 모양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배 속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꼬르릉. 허기였다. 허기라 느끼자 갑자기 더 배가 고팠다. 방울토마토, 사과반쪽, 찐 달걀하나를 먹었다. 여전히 허기졌다.
냉장고를 열었다. 조용한 새벽과 다른 냄새가 퍼졌다. 며칠 전 친정어머니가 담아주신 김장김치를 꺼내 숟가락 가득 밥을 퍼 그 위에 올렸다. '바로 이 맛이야' 새벽어둠 한 자락, 밥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이제야 살 것 같다. 뜨거운 물에 탄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식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몸이 조금씩 감각을 되찾았다.
커피를 다 마신 후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 순간, 갑자기 잠이 밀려왔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꾸벅꾸벅 잠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평소대로 한다면 여기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눈을 비비고, 몸을 움직여보고, 억지로라도 버텨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는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몸의 요구를 밀어내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싶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그냥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던지고 싶었다.
나는 그대로 누웠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등에 닿자마자 세상이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는 듯했다.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 '잠들어도 괜찮아'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깊은 어둠이 내려왔다.
한숨 푹 잤다. 눈을 떠보니 방안은 밝아 있었다. 오전 11시였다.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이상한 해방감이 더 컸다. 마치 긴 도로를 달리다 드디어 차를 멈춘 사람처럼, 어깨가 가벼웠다.
몸과 마음이 상쾌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 나 대신 세상을 잘 돌봐주었는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잠시 멈춘다고 해서 세상도 나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책상 위, 노트북은 여전히 켜진 채 있었다. 새벽에 쓰다 만 문장이 그 화면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니, 지금 나보다 조금 더 지쳐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글의 결은 날카롭고, 정리는 덜 되어 있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마치 잠들기 전, 내가 새벽이라는 시간에 기대어 억지로 버티고 있던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새 문장을 이어 적었다.
‘충분히 잘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새벽에 썼던 것보다 부드럽고, 이전보다 조금 더 나에게 관대해진 문장이었다.
어쩌면 아침잠은 나에게는 아주 작은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던 내가 처음으로 ‘나 그만 피곤할래’라고 말한 순간이었으니까.
잠은 단순히 눈을 감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느낀 날이었다. '푹 자자.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
잠은 도망이 아니라, 다시 걸어가기 위한 가장 조용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