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산길을 걸었다. 내가 집을 나선 시간은 오후 1시.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중충한 건 아니었다.
아침에 비가 왔다. 산길에는 비가 머물다간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황토흙으로 스며든 물기는 진득하게 붙어 있었고, 낙엽은 길가에 흩어져 있었다. 내리다 만 겨울비가 모든 소리를 삼킨 탓인지, 산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나는 발끝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길을 걸었다. 황톳빛 길 위로는 나무 그림자조차 없었다. 늘 이 길을 걸을 때면 내 앞에서 길게 드리워지던 나무들의 그림자가, 오늘만큼은 흔적조차 없었다.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은 자리를 포기한 듯 흐릿하게 산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텅 비어 보일까…”
나는 중얼거리며 멈춰 섰다. 나무에 매달려 생명력을 자랑하던 잎들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그 사이를 나는 걸었다. 의미를 지우듯 담담하게.
산길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우개로 훑어낸 것처럼, 모든 선과 면이 흐트러져 있었다.
길을 조금 더 오르자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그 기다란 가지들이 땅 위에 검은 그림을 남기곤 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 없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너무 당연한 이 사실이 이상하게 심연을 건드렸다.
'그림자가 없는 나무, 온전히 홀로 선'
나는 소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비에 씻긴 껍질은 반짝였고, 그 아래에 떨어진 솔잎들이 주글주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주글거림마저 이토록 선명한데, 나무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듯 고요하고 고독했다. 마치 요즘 내 모습 같았다. 나도 요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림자는 늘 따라다녔다. 부담처럼, 책임처럼, 때론 존재의 증명처럼.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림자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는 감각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도 흐릿해졌다. 마치 구름 뒤 태양처럼 숨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소나무 옆에 가만히 앉았다. 겨울 흙냄새가 훅 하고 코끝을 스쳤다. 손바닥을 땅에 대자, 차가운 흙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대고 있으니 촉촉한 흙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림자가 없다면…?'
나는 한참 생각했다. 문득,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만 생긴다는 단순한 사실이 또다시 파고 들었다.
"그럼 나는… 빛을 잃은 건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기 속에 흩어졌다. 바람이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 속에 흙과 나무 냄새가 뿜어내는 향이 폐 속 깊이 들어왔다. 숨을 들이켜자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시선도, 누구의 기대도 닿지 않는 곳, 그림자가 없어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들어온 깨달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빛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도 된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것.'
나는 일어나 길을 다시 걸었다. 여전히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그저 '나'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황톳빛 길은 흙냄새를 피워 올리며 내 발을 붙잡았다가, 조용히 길을 터 주었다. 비가 다녀간 산은 거대한 숨을 들어켰다가 조심스럽게 내쉬고 있었다.
나는 그 숨결 속을 천천히 걸었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오면 그림자는 다시 생겨날 것이다. 그때는 또다시 이 길 위에 나무 그림자도, 그 길을 걷는 내 그림자도 생길 것이다.
오늘, 산길은 그림자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림자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하루였다.
빛은 잃는 것이 아니라, 잠시 구름에 가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