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금, 새 시간

새 해금이 내게로 왔다.

by 담서제미

2026년 새해, 나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했다. 작년부터 "내년에는 꼭 새 해금을 살거야" 나에게 약속했던 일이었다.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의 서툰 손길을 묵묵히 견뎌준 낡은 해금과 이별하고, 새로운 해금을 품에 안았다.


내가 해금을 만난 건 순천만 와온해변이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구슬프면서도 아련하게 들려오던 그 소리.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고여 있던 기억이 일렁이는 듯한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것이 내 해금 인생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함께한 십사 년은 늘 충분하지 못했다. 직장이라는 이름의 분주함 속에서, 삶을 꾸려야 한다는 책임의 무게 속에서 해금은 언제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악기를 손에 쥐고도 마음이 갈 곳을 몰라 서두르면, 소리는 결코 깊어지지 않았다. 배운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나는 늘 언젠가라는 기약만을 남겨둔 채 살았다.


2년 전, 정년퇴직과 동시에 나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았다. 그 시간의 가장 첫자리에 해금을 올려두었다. 이제는 더 이상 다음에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숨을 고르듯 활을 켜고, 그 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어느덧 2년을 꽉 채웠다.


그 2년간 꾸준함을 담보 삼아, 2026년이 오면 나에게 새 해금을 선물하겠겠노라고 공언했다. 마침내 약속을 지키는 날이 왔다.


이왕 사는 거 좋은 것을 사자 마음먹었지만 막상 길을 나서려니 망설여졌다. 그 길에 해금반 회장님과 총무님이 든든한 동행이 되어주었다.


악기점에 늘어선 여러 대의 해금들. 우리는 하나하나 악기를 들어보고, 조심스레 활을 그어보며 소리의 결을 살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감촉과 귓가를 울리는 울림을 세밀하게 비교하던 중, 어느 순간 마음이 툭 멈춰 서는 악기가 있었다.


"이 소리다."

와온의 노을 아래서 들었던 그 아련함이, 이제야 내 손끝에서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그 확신 하나면 충분했다.


14년을 함께한 옛 해금을 내려놓는 순간, 이별의 아쉬움보다 고마움이 먼저 밀려왔다. 부족한 주인을 만나 긴 세월을 견뎌준 악기. 서툰 손길에도 묵묵히 제 소리를 내어주던 오랜 친구. 그 작별은 끝이 아니라, 그다음 생으로 건너가기 위한 다정한 인사였다.


새 해금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길. 내가 산 것은 악기가 아니라, 지난 2년의 시간을 성실히 통과해 온 나에게 건네는 가장 다정한 격려이자 응원이었다.


이제 내 앞의 2026년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눈부신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매일 조금씩 더 깊어질 나의 소리가, 나의 새로운 날들이 벌써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깨달음 한 줄>

내 삶이 안정되고 나서야 오래 아껴온 것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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