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경이 바뀌는 순
눈이 있었다. 이미 내린 눈이.
새벽에 눈을 떠 창밖을 내다보니, 자동차 위에, 아파트 주차장 바닥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세상에 이불을 펼쳐 놓았다.
수영을 갈까, 앞산을 걸을까, 아니면 다른 길을 개척할까.
길을 나서기 전, 내 앞에는 세 갈래의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수영복을 챙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를 지우고, 늘 가던 앞산 대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택했다.
'익숙한 길보다는 동네이지만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로 가 보자'
고속도로 아래, 하천을 끼고 이어진 길.
응달진 곳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양달 진 곳의 눈은 녹아 질척거렸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마른땅을 골라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걷는 속도는 자연스레 느려졌고, 시선은 자꾸 바닥을 향했다. 모자와 목도리까지 둘러썼었도 찬바람이 어찌나 매섭던 지 밖으로 살짝 나온 귀밑이 바람바늘로 찔린 듯 아팠다.
하천을 사이에 두고 생긴 길은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폭이었다. 그 길 위를 드문드문 사람들이 걸었고, 그 보다 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갔다. 나는 자동차가 올 때마다 길 끝에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걸었다. 마치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것처럼.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작 집 근처에서 이십 분 정도 벗어났을 뿐인데, 풍경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아파트와 신호등 대신, 물소리와 흙냄새가 있었다. 그 위에 내 마음을 꺼내 올려놓았다.
눈이 쌓인 길과 녹아버린 길이 뒤섞여 있듯,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들과 이미 흘려보낸 것들이 한데 섞여 풍경처럼 떠 있었다. 쌓인 눈도, 질척이는 흙도, 햇빛에 노근노근거리는 마른땅도 그 위에 내려앉았다. 삶은 늘 그런 식으로 여지를 남겨 둔다.
“길은 걷는 자의 발걸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안토니오 마차도의 이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오늘 내가 걸은 길도, 어쩌면 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선택했고, 발을 내디뎠기에 길이 되었을 뿐이다.
만 이천보를 걸은 산책길.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그 길을 걸으며 마음의 층들이 한 칸 한 칸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좋았다. 다른 나라, 다른 인생을 꿈꾸지 않아도 익숙한 삶의 가장자리에서, 단 한 번 방향을 틀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풍경은 충분히 달라진다.
눈은 시간이 되면 모두 녹는다.
하지만 내가 걸었던 고요와 발걸음은 오래 남는다. 인생도 그렇다. 지나간 순간은 사라지지만, 마음으로 걸었던 풍경은 오래도록 우리 안에 머문다.
<깨달음 한 줄>
인생의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처음 선택한 발걸음 바로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