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의 시간
산책길 끝자락에서 나는 그 나무를 만났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오래된 나무 하나였다. 하지만 몇 발짝 더 다가서자, 그것은 나무라기보다 세월이 몸을 빌려 서 있는 어떤 존재처럼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이야기꾼처럼.
나무의 줄기는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등이 굽어버린 할머니처럼 이 나무도 그랬다.
"허리가 아파서 어떡해."
"왜 이렇게 되었어."
아무도 묻지 않았을 그 말을 나는 나무에게 건넸다. 고목은 그저 말없이 구부러진 채 서 있었다.
갈라진 껍질은 영겁의 세월을 견뎌낸 훈장처럼 보였다. 갈라지고 솟아오르고, 다시 꺼진 표면 위로 세월이 층층이 얹혀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거칠게 긁힐 것 같은 그 몸에는 바람과 비, 눈과 햇살이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치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주름으로 새겨진 얼굴처럼.
나무의 중심부는 유독 두툼하고 단단해 보였다. 오래전에 잘려 나간 자리, 썩었다가 다시 아문 자국들이 한 몸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안쪽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이 자라고 있었다. 살아온 시간은 이 나무를 망가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버티는 법을 가르쳐 준 듯했다.
가지들은 모두 잎을 내려놓은 채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말라버린 듯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가지 끝마다 아주 작은 생의 기운이 숨어 있었다. 아직 터지지 않은 새잎의 눈이 겨울의 빛을 조용히 받아내고 있었다. 나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잎 없는 가지들이 서로 스치며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나는 아직 여기 있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 살아 있다고, 한 발 더 내딛기 위해 잠시 휴지기에 들어간 거라고.
나는 나무껍질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도 사람하고 같구나."
이 고목은 봄을 재촉하지 않았다. 잎이 없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꽃이 피지 않는다고 자신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다만 봄이 올 것을 믿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내 생각일 뿐,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어쩌면 추운 겨울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있으면 이 나무에도 푸릇푸릇한 잎이 피겠지. 처음에는 연약한 연둣빛으로, 망설이듯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이 나무가 견뎌온 모든 세월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이렇게 말하리라.
그래도 살아 있었다고.
나는 그 나무 앞에 오래 머물렀다.
“봄은 잎이 없는 시간을 견딘 것들에게 먼저 온다.”
고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잎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산책길에 친구가 하나 더 생겼다. 봄이 되면 이 나무에 돋아난 잎들이 지금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