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는 네 개, 어른은 두 개, 할머니는 세 개
아침 6시 40분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내장사 단풍구경을 가자고 했다. 일찍 가야 복잡하지 않을 거라고. 내장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8시 전이었다. 아들 말대로 도로는 한산했고 주차장은 넉넉했다.
아들이 대학생이었을 때, 남편과 둘이 왔었던 내장사 단풍은 절경이었다. 그때 기억이 강렬해 내 머릿속 단풍하면 먼저 떠오른 곳이 항상 내장사 가는 길이었다.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내장사는 한 폭의 그림처럼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회색빛 하늘에 숨은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단풍잎을 스쳤다. 나뭇잎마다 가을의 빛을 담고 있었다. 붉은빛에 물든 잎은 손끝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옆에 선 노란 잎들은 흐린 하늘을 빨아들인 듯 촉촉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 잎 두 잎 땅에 내려앉은 잎사귀들은 길 위에 노랗고 빛바랜 갈색 융단을 만들었다. 사찰로 이어진 길은 곳곳에 융단이 깔려 있었다. 수북이 쌓인 잎에서는 사람들의 사그락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가을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내장사 연못 위에는 파란 정자가 있었다. 선명한 청색 지붕은 울긋불긋한 단풍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눈에 띄었다. 그 주변을 감싸는 단풍나무들이 자연 속 화폭처럼 둘러서 있었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붉고 노란 잎을 가득 매달고 고요한 연못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잔잔한 연못 속에 하늘과 단풍나무, 파란 정자가 선명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물속에 담긴 정자와 단풍나무들은 현실의 색보다 더욱 깊고 그윽한 색으로 물들어 또 하나의 세계가 물속에 숨겨져 있는 듯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붉고 노란 잎들이 연못 위로 떨어졌다. 물결이 그 잎들을 흔들 때마다 파란 정자와 단풍나무의 그림자도 흔들렸다. 두 개의 정자와 단풍나무들이 마주 하고 있는 장면은 시간과 공간이 멈춘 듯 고요했고 신비로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타고 온 아이를 아빠가 깔아놓은 돗자리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제 세상인 듯 이곳 저곳으로 기어 다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네 발로 움직이며 작은 몸으로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아이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두려움 없이 매 순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부딪치며 경험하던 때가.
그 옆에서는 사람들이 천천히 두 발로 걸으며 노랗고 붉은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가을의 정취를 감상하는 모습 속에는 그들만의 여유가 있었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하루지만 그 속에서 작은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속에 녹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삶에 균형감각을 찾고자 하는 중년의 모습이 있었다. 직장과 가정,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주어진 무게와 책임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쩌면 이 시기 무게가 가장 무겁고 힘겨울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삶에 대한 의미와 성장을 깊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제와 다른 오늘,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 속에서 의미를 찾는.
엉금엉금기어가는 아이 옆으로 왼손에 나무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느리게 땅을 딛고 계셨다. 검은색 가방을 짊어진 할머니의 등은 거의 구십 도로 굽어 있었다. 지팡이가 땅바닥을 탁하고 짚으면 그것을 의지삼아 왼발이, 그 뒤를 오른발이 느리게 따라 나왔다.
할머니 발은 세 개였다. 지팡이라는 발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 모습은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의 무게가 몸에 남긴 흔적이었다. 더 이상 빠르게 달릴 필요도, 목표를 향해 나아갈 필요도 없는 할머니는 그저 세 발에 의지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계셨다. 풍경과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삶의 속도보다는 깊이가 중요하다는 듯이 지팡이와 함께 걷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니 '느림의 철학'이 떠올랐다. 그것은 느린 걸음 속에서 세심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주어진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깊어가는 가을 내장사 그곳에는 갓난아이가 기어가고 있는 네 발, 사람들이 걷고 있는 두 발, 할머니가 의지하며 딛고 있는 세 발이 있었다. 세대도 삶도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길 위에 있었다. 갓난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이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는 여정이 고스란히 한 장소에 있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였다. 우리 각자가 선택한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고, 살아가는 발자국들이 인생궤적이 되는.
오늘도 우리는 자신만의 걸음으로 가을 속을 걷는다. 각자 길 위에서 짊어지고 가는 무게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무게다. 갓난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할머니에게도.
가벼운 발걸음이든, 무거운 발걸음이든,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결국은 흔적으로 남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짊어지고 각기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지구라는 별에서 여행자로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