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가 누나 용돈 줄 수 있어요
새벽부터 해금 산조 중모리장단을 듣고 있다. 국악의 꽃은 산조라고들 한다. 몇 주 전부터 산조 장단에 빠져 있다. 해금 산조 안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밝고 빠른 가락에는 희망과 기쁨이, 강렬하면서도 역동적인 음은 분노 같은 극적인 감정이, 가늘고 떨리는 듯한 소리는 이별과 슬픔을, 흥겨운 리듬 속에는 활기찬 즐거움이 있다.
두 개의 현과 활만으로 삶의 다양한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 해내는 해금은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다"라고도 한다. 해금을 접하기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비록 취미로 배우긴 하지만 해금을 연주하는데 산조는 해 봐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몇 주 전부터 중모리장단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 주 전이긴 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중모리장단 연습을 시작한 것은 어제부터다.
아, 어렵다. 그동안 내가 연습했던 곡들은 중모리장단에 비하면 세 발의 피였다. 중모리 안에는 복합적인 인생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 소리가 슬플 때는 한숨처럼 느껴진다.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슬픈 기억이 떠오른다. 그건 단순히 우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해금이 주는 슬픔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울지 못하고 참았던 감정들이 해금 소리와 함께 스스로 풀어진다.
이 새벽, 해금 중모리장단을 연이어 들으며 나는 2006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이제 제가 누나 용돈 줄 수 있어요
2006년 내 글 속에 자주 등장하던 이가 있었다. 그는 2005년에 구직자로 인연을 맺었다. 나랑 같이 성취 프로그램 진행을 했던 정 선생을 엄마처럼 따랐다. 그는 잠시 짬이 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사소한 일까지 정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2006.02.1. 오마이뉴스 게재
"이사를 가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몸이 아픈 데 회사 안 가도 돼요? 누나 때문에 걱정인 데 어떻게 해야 돼요" 등등. 매일 전화를 해서 조언을 구하곤 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줘야 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해 온 그에게 짜증이 날법도 한데 정 선생은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뿐 아니라, 정 선생은 아들과 체격이 비슷하다며 옷을 가져다 그에게 주기도 했다. 그에게 정 선생은 엄마였다.
그는 고아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세상에 남겨진 혈육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 누나와 단둘이었다. 27살이 된 그때까지 누나와 살고 있었다. 누나는 그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충격에 그는 오래도록 정신이 아팠다. 약물치료를 하고 있는 그의 최대 목표는 취업이었다. 위출혈로 피를 토하면서도 3교대 근무를 하는 누나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동생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항상 누나 걱정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에게 그는 항상 1순위였다. 그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직공장 생산직에 취업했다. 3교대였다. 월급을 받아서 동생 약 값과 용돈을 줬고 생계를 꾸러 나갔다.
누나 덕분에 아쉬울 것 없이 자랐다는 그는 취업알선을 받아 여러 번 취업을 하기는 했지만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오래 다니질 못했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났다. 꾸준히 전화를 걸어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왔다.
그렇게 일 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소식이 뜸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정 선생과 나는 걱정을 했다. 몇 달이 흘렀다. 그에게 취업이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은 초여름이었다.
5개월째 근무 중이라고 했다. 그동안은 거의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했었다. 이제 오래 근무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그의 말에 정 선생과 나는 박수를 쳤다. "장해요. 너무 대단해요. 약 꼬박꼬박 챙겨 먹고 밥도 잘 먹어야 돼요"라며 축하를 했다.
다섯 번째 월급을 받은 후 그는 누나와 같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왜 누나를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럽고 힘들 때마다 서로 마음 붙이며 살아온 남매의 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동안 저를 돌아 볼 시간이 없었어요. 동생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살았어요"라고 누나는 말했다. 동생을 돌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온 누나. 누나의 이십 대 청춘은 방직공장 실과 함께 사라져갔다.
아파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는 누나에게 "누나, 내가 용돈 주기로 했잖아. 그동안 누나가 나한테 다 해 줬잖아. 이제 내가 누나한테 해 줄게"라며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정 선생도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정 선생과 내가 인사이동이 있기 전까지 찾아왔다. 정 선생이 정년퇴직하고 나도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서 인연이 끊어졌다.
2006년에 27살이었던 그는 2024년인 지금 45살이 되어 있으리라. 그때 그가 간절히 원했던 누나가 어서 빨리 나아서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대로 되었으리라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60대 담서제미가 40대 담서제미를 불러 2006년 27살이었던 그를 만났다. 2024년 45살이 되었을. 여전히 그를 응원하고 있는 2024년 12월 12일 새벽, 거실에 가득 퍼진 해금 중모리장단속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희로애락이 있었다.
해금 중모리장단 가락에 들어 있는 선율이 나에게 속삭인다. 인생의 슬픔, 기쁨, 분노, 평온이 해금 선율 속에 들어 있다고. 삶은 아름다울 것이고, 울고 웃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증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