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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방

내가 살던 고향은

by 담서제미


“무슨 애가 쥐새끼보다도 더 작다냐”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은 후 처음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1964년 설 명절 다음 날 밤 스물세 살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 이 세상으로 나왔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가 함께 살던 초가 건넌방이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삼촌, 고모, 사촌오빠들까지 대가족이 살던 그 시절.

어려서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를 보고 어머니는 늘 미안해하셨다.


“층층시하 눈치를 보느라 열 달 내내 입덧이 심했써야.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 속에 있을 때 내가 못 먹었쓴 게 니가 당연히 쬐간하게 수밖에 없었는지, 너를 낳자마자 쥐새끼보다 작다고. 그 말이 서운해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아플 때마다 나는 이 말을 어찌나 들었던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그 말속에는 병치레가 잦은 나에 대한 어머니의 미안함과 사랑이 들어 있었다.


친척들이 무리를 지어 살았던 1960년대 설 명절. 설날이 되기 전부터 음식을 하느라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한 시도 엉덩이를 바닥에 댈 틈이 없었다. 산달이었던 어머니는 명절 전날부터 슬슬 배가 아팠다. 층층시하 어른을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는 아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배 속에 있는 나를 달래며 명절 준비를 했다.


명절날이면 종갓집이라 일가친척들이 세배하러 모여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으나 어머니는 그것이 산통인지 알지 못했다. 명절을 넘기고 다음 날이 되자 통증은 더 심해졌다. 어머니가 통증을 호소하자 산실이 차려졌다. 그곳은 곳간 옆 건넌방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산통은 밤 8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나는 그렇게 설 명절 다음 날 밤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 부모님은 분가하셨다. 할아버지 집 마당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지척으로. 논일과 밭일이 아니면 해 먹고살 것이 없었던 그곳에서 농사일은 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달달 외울 정도로 천재 소리를 들으셨던 아버지는 농사를 짓거나 몸을 쓰는 일에는 약했다. 반면에 외가는 부농이었다. 머슴을 두고 살았던 외가에서 어려서부터 논일과 밭일을 거들었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일을 잘했다.


아버지 하루 일과는 새벽에 깬 나를 등에 업고 동네를 마실 다니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등은 어머니 입을 통해 수시로 나에게 전달이 되었다. 내가 반항하거나, 짜증을 부릴 때면 “느그 아부지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냐?” 그건 단골 말이었다.


거기에 잊지 않고 덧붙인 말이 있었다.

“니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아냐. 내가 지엇써야. 라디오에서 연속극이 나온디 그 주인공이 명숙이엇서야. 딸을 나면 꼭 그 이름으로 지어야제 했제. 어찌나 좋던지”

그렇게 나는 1964년생 명숙이가 되었다.


내가 유년에 살았던 초가 바로 앞에는 둑이 있었다. 마당은 넓었고, 지붕 위로는 볏짚이 두텁게 엮여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대청마루에 길게 이은 줄에는 곶감과 무잎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마당에서 장작을 팼다. 어머니는 가마솥이 있는 아궁이에 쭈그려 앉아 불을 지펴 아침을 준비했다. 불길이 퍼지면 방 안쪽은 뜨거워 차가운 곳을 찾아 몸을 둥그렇게 말아 굴러다녔다.


겨울 아침이면 방 안 가득 퍼지던 장작 냄새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불 밖은 추웠다. 문 틈새로 들어온 찬 공기가 볼을 스치면 아랫목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개구리 수영을 하면서 놀았다.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녔다. 큰 딸이었던 나는 고무신도, 옷도 새것이었다.


자식이 셋이 되자 아버지도 농사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과 나를 집에 두고 이제 갓 태어난 여동생을 등에 업고 논밭 일을 하러 다녔다. 모내기 철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돌아가면서 품앗이했다. 농사는 어느 한 집의 일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 일이었다. 천재 소리를 들으셨던 아버지는 농사꾼이 되었지만, 현실은 남루했다.


마을의 풍경은 계절에 따라 달라졌다. 봄이면 들판 가득 꽃이 피어났다. 여름이면 논밭이 푸르게 물들었다.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렸다. 겨울이면 몽실몽실한 눈이 마을을 덮었다. 그 모든 풍경은 나의 유년 시절을 아름답게 수놓았지만, 자식 셋을 둔 부모님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시간은 흘러갔다. 가난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었지만 부모님의 사랑만큼은 차고 넘쳤던 그곳. 내 유년 시절을 지탱해 준 고향은 더 이상 부모님에게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다. 여섯 살까지 살았던 내가 살던 고향. 비록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시절 온기는 여전히 내 무의식에 남아 나를 성장시킨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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