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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은 우리의 놀이터

재래식 화장실과 약장수

by 담서제미

우리가 두 번째로 이사를 간 곳은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있었다. 첫 번 째 집이 골목 초입에 있었다면 두 번째 집은 골목 안쪽이었다. 방이 두 개였다. 도랑 위에는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다리를 지나면 대문이었다.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왼쪽에는 수돗가와 그 위에 장독대가 있었다. 그 집에서 세 가족이 살았다. 주인집 할머니와 아들내외, 우리 가족 여섯명과 공장을 다녔던 아저씨. 내 기억속에는 혼자 살고 있는 아저씨였다.


재래식이었던 화장실은 늘 넘쳤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 산무덤처럼 올라왔다. 여름이면 구더기가 화장실 밖까지 나와서 기어다녔다. 하얗게 꿈틀거리던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기겁을 했다. 아침에 기어다니던 구더기는 오후가 되면 바싹 말라서 사람 발길에 바스라졌다. 그것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다음해 여름이 되면 또 다시 이어졌다. 나는 여름마다 변비에 시달렸다. 그 기억은 너무 강해 지금도 화장실을 기어다니는 구더기 꿈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도 한다. 화장실에 대한 기억은 세번째 살던 집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깔끔한 화장실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가 집을 산 이후였다. 드디어 우리집이 생긴 후가 되어서야 나는 화장실 공포에서 벗어났다.


또 하나 기억은 해마다 찾아오는 찾아온 약장수였다. 1970년대 한 여름의 퇴약볕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던 초저녁. “둥둥둥” 울리던 북소리는 우리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북을 등에 지고, 손에는 낡은 스피커와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북소리도 따라 울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형님, 누님, 얘들도 이거 하나만 잡숴봐. 귀신도 쫓고 병도 고치는 신비한 약이 왔어요“

북소리 장단에 맞춘 그의 목소리에는 가락이 있었다. 약장사를 중심으로 공터에는 동그란 사람원이 만들어졌다. 나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쪼르르 달려갔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빙둘러선 공터. 사람숫자가 많아질수록 약장수의 목소리에는 흥이 넘쳤다.


치마가 발목위까지 내려온 한복을 입은 여자가 ‘홍도야 울지마라’ ‘목포의 눈물’를 부르고 나면 약장수는 주머니에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걸 보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흔들어 보였다.

"여기 허리 아픈 우리 엄니, 배앓이 하는 아들, 이 약 잡쉬봐. 이 약으로 말하면 만병통치약. 다리 아픈 것도, 머리 아픈 것도 다 낫게 해 줘”


약장수가 한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였다. 그의 말에 어른들의 웃음이 수시로 터졌다. 그럴수록 몸짓은 우스꽝스러웠다. 발걸음과 북소리가 한 몸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북소리가 크게 작게 빠르게 느리게 울렸다. 그의 몸짓은 어느새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각종 약병과 그릇을 비롯한 다른 것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공터는 큰아버지 집 바로 밑에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나는 공터에 찾아올 약장사를 기다렸다. 그 곳에는 북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약장수는 그렇게 한바탕 공연을 끝내고, 약을 팔고 떠났다. 남은 건 공터 여기 저기에 널려있는 쓰레기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연은 삐에로가 공중제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날 약장사가 팔았던 약이 무엇이었는 지 다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 것은 회충약이었다. 뱃속에 회충이 있으면 키도 크지 않고, 밥을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니 꼭 사서 아이들에게 먹이라는 말에 부모들이 하나둘 그 약을 샀다. 이 약을 먹으면 내일 아침이면 바로 회충이 빠져나온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으며.


약장사가 다녀간 후 다음날부터 삼사일간 동네 골목 이곳 저곳에 똥이 있었다. 골목 끝 집인 나는 그것을 피해 한쪽에 바싹 붙어서 걸었다.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걸었지만 안 보려고 하면 할수록 눈에 들어왔다. 때로는 약장사 말대로 기다란 회충이 있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 난 후면 나는 또 변비에 시달렸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이 공포였다.


1970년대, 도시 골목길 그 곳에서 희망이 움트고 있었다.

사시 사철 우리의 최고 놀이터는 골목길이었다. 도랑을 낀 길은 동생과 내가 손을 잡고 걸으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좁은 길가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 사이로 흙먼지가 날렸다. 어떤 아이들은 맨발로 어떤 아이는 고무신을 신고 거리를 누볐다. 놀이터도 놀거리도 없던 시절, 도시 골목길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선을 긋고 딱지를 치던 시간, 작은 구슬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굴리던 순간,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 곳에서 땅따기먹기, 말뚝박기, 고무줄놀이, 콩주워먹기를 하며 놀았다. 온종일 뛰어 놀아도 집에 들어와서 숙제하라는 말이 없었다. 그러기 전에 이미 해 버린 것도 있었지만, 그저 신나게 노는 것이 전부였다. 여럿이 줄넘기를 할 때면 줄넘기 줄을 서너개씩 묶었다. 양옆에서 “하나, 둘, 셋” 하고 외치는 소리에 맞춰 우리는 줄안으로 뛰어 들었다. 줄에 걸려 넘어진 아이, 줄을 가뿐히 넘은 아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했다. 맨발로, 또는 구멍 난 고무신을 신고도 골목길을 달릴 수 있는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들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우산도 없이. 골목길에 생긴 크고 작은 구멍은 둠벙이 되었다. 맨발로 흙탕물을 첨벙이며 놀았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가 크고 깊을수록 물장구치기가 좋았다. 옷은 흠뻑 젖었고 매번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놀이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간다.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어린 기억이 나를 빗속으로 이끌고 있음을 매번 느낀다.


그 시절 옆 집 대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이 집, 저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좁은 마당에 줄을 쳐 널어놓은 빨랫줄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며 숨바꼭질을 했다. 우리집으로 들어오기 전 골목 위에 있던 구멍가게에서는 문이 닫혀 있을 때만 빼고 라디오소리가 들렸다. 그 앞 있는 편상은 동네 어머니들의 모임장소였다. 그 곳에 모여 명태껍질을 벗기거나 마늘껍질을 까기도 했다. 온갖 부업거리들이 그 곳에 모여들었다.


내가 자란 도시 빈민가 골목은 우리가 뛰놀며 성장했던 곳이자, 희노애락을 나누던 작은 세상이었다. 놀면서 싸우기도 했지만 금방 화해를 했고 누군가 넘어지면 모두가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무릎이 깨져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도 바로 돌아와 웃으며 뛰어 놀던 골목길.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추억속에만 존재하는 그 시절 골목길. 빽빽이 들어선 건물, 아스팔트로 덮인 거리에서 때때로 나는 어린 시절 골목길을 그리워한다. 가난했지만, 그 속에서 누구보다 따뜻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시절.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으나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자였다.


행복이 무엇인 지 몰랐지만 그저 즐거웠던 시절. 어찌보면 부족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법을 알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서로 기대며 자랐고, 작은 기쁨에도 크게 웃을 줄 알았다.

이제 가까운 기억보다 먼 추억이 더 또렷해진 나이가 되어 그 시절을 떠올려 본다. 여름이면 까맣게 탄 얼굴, 겨울이면 줄줄 흘러내리던 콧물을 흘리며 뛰어놀던 아이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저녁밥 짓는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기억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그때 그아이가 이제 686이 되어 2025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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