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담이란?
‘일자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상담을 통해 만난 많은 사람은 일자리를 잃은 후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도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야’라는 상실감에 더 크게 좌절했다.
직업상담을 하면서 내가 많이 했던 말이 있었다. “당신은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때로는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직업상담은 일자리 소개를 넘어 내면 깊숙한 상처를 어루만지고,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상담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그들의 서사가 있었다. 어떤 이는 작은 가능성 하나에 목을 맸다. 어떤 이는 화려한 경력을 지녔지만, 방향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 그들을 상담하면서 나는 매번 깨달음을 얻었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사십이 다 되도록 남편 그늘에 살다 사별 후 취업하기 위해 찾아온.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 있는 그녀는 결혼 전에는 촉망받던 예술가였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았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게 평온했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자랐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남 부러운 것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이 죽자,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다행히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열정을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눈빛은 점점 생기를 찾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나는 그녀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직업상담이란, 사람의 숨겨진 빛을 찾아주는 여정인 것을.
직업상담 영역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자이자 메마른 터전을 옥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씨앗이었다. 직업상담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사회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하던 직업상담은 차츰 영역이 넓어졌다. 전 생애에 걸친 직업상담, 진로지도로 확장되었다. 사람마다 가진 적성과 흥미는 다르다. 직업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진로지도 영역은 거의 백지상태였다. 차츰 그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직업상담은 전 생애에 걸쳐 지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되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진로 캠프가 열렸다. 나 또한 수많은 학생을 만났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내가, 우리가 했던 취업캠프나 컨설팅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특성화고 취업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였다. 나는 그때 목포에서 근무 중이었다. 진로지도를 담당한 인원이 1명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첫 배 타고 섬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진로지도 담당자 혼자는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려워 내가 같이하겠다고 했다.
취업 지원팀장을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교육청과 전남 서부지역 특성화고와 진로지도 협약체결을 했다. 그 해 우리는 목포, 영암, 강진, 해남, 신안, 완도, 진도 도서 지역 특성화고를 전부 다녔다. 지금은 연륙이 되었지만,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첫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신바람이 났다. 같이 일하는 동료도, 그 길에서 만난 아이들도 좋았다. 벚꽃이 필 때 시작한 취업특강은 여름이 오기 전에 끝이 났다. 가을부터는 서류와 면접클리닉을 체계적으로 했다.
그때 당시 공무원이나 공기업에 1차 합격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면접클리닉을 진행했다.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매일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선생님 덕분에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편지와 문자, 전화가 왔다. 그걸로 족했다. 그해 우리는 취업과 진로지도 모든 부문에서 최우수를 받았다.
(2013. 7월 어느 날 아침 사무실 책상위에 남겨진 메모)
도서 지역이라 서류전형, 면접클리닉을 비롯한 진로지도 혜택은 도시에 거주하는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은 학생과 구직자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나를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게 했다. 무조건 발로 뛰었다. 학생들이 안정적인 취업을 할 수 있도록, 산업 현장과 연결해 주고 실질적인 취업 컨설팅을 진행했다. 때로는 진로지도를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첫 배를 타고 섬까지 들어가 학생들을 만났다. 도심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와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역 학생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섬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을 때면, 이 일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이라고 더욱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조금 더 멀리 가는 것도, 조금 더 애쓰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체험 캠프도 했다. 청소년들에게 직업의 의미를 알려주는 강의도 했다.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모든 게 가치가 있었다. 때로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농사밖에 아는 게 없어”라고 말한 농부에게 농업 컨설팅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변화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오래전 상담했던 구직자에게 날아든 편지 한 통. 그것으로 충분했다.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저도 누군가의 꿈을 돕고 싶어요.” 그 편지를 읽으며 직업상담원은 하늘이 나에게 준 소명이라 여겼다. 직업상담은 누군가의 삶에 작은 불씨를 심는 일이었다. 그 불씨는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