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끝에서 만난 희망
퇴직하기 전까지 28년간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좌절과 도전, 실패와 성공, 상실과 희망이 뒤섞인 그들 사연 속에서 나는 ‘기회’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다. 내가 만난 그들 이야기 속에는 때로는 환호를,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애잔함이 있었다. 그들과 울고 웃었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절망 끝에서 만난 희망>
직업상담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앉았다. 눈동자는 힘이 없었고,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을 끝자락인데도 겉옷은 얇았다. 잠바 안에는 반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그는 20년 넘게 다녔던 직장에서 97년 IMF 때 해고를 당했다며 털어놓았다. 마음에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속을 파고든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년 동안 쉬는 날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일이 전부인 것처럼 매달리며 살았던 삶이었다.
그때 당시 산골에서 대학에 갔던 사람은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부모님도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듯, 내로라하는 기업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며느리에 대한 기대도 컸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때 당시, 자원봉사를 다니던 곳에서 만난 지체 장애가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 월급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아내에게 주었다. 자신은 출장비나 기타 경비로 용돈을 썼다. 살림도 잘하고 두 아들도 잘 키워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자신에게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닥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시름에 빠진 그에게 처음에는 아내도 “금방 재취업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재취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리해고는 계속 이어졌고 일자리는 없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치킨집을 했다. 2년 동안 빚만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더 이상 당신하고 못 살겠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 앞으로 건물과 땅이 곳곳에 있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이 벌어서 준 돈이 종잣돈이 되어 쌓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자신과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이혼 후 부모님이 계신 선산에 가서 자살할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버스터미널을 가기 위해 배회하다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구인 업체와 구직자를 연결해 준다는 홍보문구를 보고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로는 말보다 경청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3개월만 미루시면 안 될까요?”
그와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우리 사무실로 출근했다. 집단상담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끝난 후 그때 당시 공공근로였던 구인 개척 요원에 선발이 되었다. 날마다 기업체를 방문해서 구인표를 받아오는 일이었다. 그는 우리 사무실 근처에 달방을 얻었다. 차츰차츰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구인 개척을 하면서 자신의 일자리도 스스로 발굴했다. 기업체를 방문해 보니 현실이 보이더라는 그는 석 달이 되기 전에 하남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자재관리부에 취업했다. 오십이 다 되어 재취업에 성공한 것은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때는 더 어려웠다. 어떻게 구인 기업을 찾았냐고 물어봤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사전탐방이었다. 구인 발굴을 다니면서 마음에 든 기업을 발견하고 날마다 들러서 구인이 있는지 알아봤다. 자재 쪽에 인원이 부족하긴 한데 사정이 어려워 채용 못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경력직이지만 월급은 많지 않아도 된다며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최대한 드러냈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결정해도 된다며 사장을 설득했다. 그는 취업에 성공했다. 간절한 마음이 취업이라는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미소를 되찾았다. 다음 주부터 출근한다며 깔끔한 복장으로 인사를 하러 왔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첫 월급을 받은 날, 고맙다며 빵을 사 오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지속해서 잘 다니고 있다는 그는 나에게 자신을 살린 은인이라고 했다.
나는 단지 그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끄집어내 준 것뿐이었다. 그때 얻은 깨달음이 있었다. 기회란, 이미 그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해 주는 순간에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