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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다시 일할 수 있어요

전업주부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고귀한 직업

by 담서제미


“다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선생님 덕분이에요.”

이 짧은 문장이 가진 울림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덕분에’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내가 누군가에게 덕분이 되었고 나 또한 누군가의 덕분에 이리 찬란한 60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대다수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게 여기고 있다는 거였다.


전업주부라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최초 직업상담원이 되기 전까지 나 또한 7년간 전업주부를 했다. 전업주부였을 때, 나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나만 뒤처져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양가 행사 때 같은 선물을 하더라도 친정에 들어가는 것은 눈치가 보였다. 남편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주눅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경제적인 주체성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독립적인 인간이 아닌 때로는 종이 인형 같다는. 그 속에는 누구의 엄마, 아내는 있는데 이명숙이라는 내 이름은 없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찾아온 산후우울증을 파고들어 가 보니 그 안에 이런 내 모습도 있었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나를 찾아온 전업주부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애들만 키웠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남편이 벌어온 수입으로 쪼개고 쪼개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아이들을 키워낸 그녀들은 스스로 가치를 폄하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 세상의 모든 중심을 자식들에게 맞춰 살아온 그들에게 찾아온 빈둥우리증후군은 깊디깊었다.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이야기는 시간제한이 없었다. 공통으로 나오는 말은 “무어라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였다.

나는 그녀의 삶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 집중했다. 아이를 키우며 쌓은 시간 관리 능력,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며 익힌 조직력, 가족 구성원들을 돌보며 키운 문제 해결 능력. 그것들이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안에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그것은 나를 통해서도 입증이 된 것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 줬다. 7년간 전업주부를 하면서 느꼈던 마음속에 갈증과 허기들. 살기 위한 몸부림들을. 무엇보다도 전업주부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전업주부로 살았을 때는 나 역시 그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하지만 워킹맘이 되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전업주부는 워킹맘을 능가하는 고귀한 직업이었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일을 하는 엄마의 빈자리는 표가 났다. 워킹맘이 일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나는 친정 부모님이 그것을 대신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의 빈자리가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내가 전업주부로 살았던 그 시간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해왔어요. 다만 스스로 보지 못했을 뿐이에요.”

자괴감에 빠져있는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 내 경험담과 함께 이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이 그녀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심었다. 어떤 이는 직업훈련을, 어떤 이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녀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큰 것이 아니었다. 소소하지만 당당하게 돈을 벌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원했다. 나와 함께 취업을 준비했던 많은 경력 단절 여성들이 제 길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선생님, 덕분에 시작할 수 있었어요.”였다. 그런 편지나 전화를 받은 날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말속에 내 모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상담실장님의 한마디, “백향목이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직업상담을 하면서 내가 받은 은혜를 되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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