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연필을 깎을 줄이야...

예중 입시에 대한 기록_5

by Gaemi

예중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연필 깎기 문화가 있다.

미술학원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연필 몇 자루만 준비하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연필 깎기 세대가 아니다 보니, 칼로 연필 깎는 현장조차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깍지 못해, 친정 부모님에게 조금 부탁하다가 딸이 직접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 넘게 딸은 매일 연필을 몇 자루씩 깎으며 집을 나섰다.

나는 이상한 고집을 폈던 것 같다. 자기가 그리는 연필이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깎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연필을 깎아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네이버 카페에서도 엄마들이 서로 자기가 깎은 연필 사진을 올리면서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딸이 직접 연필을 깎게 놔 두었다. 딸 또한 엄마인 나에게 연필을 깎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진 것이다.

너네 엄마는
연필도 안 깎아 주시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졸린 눈으로 몇 시간씩 깎았던 연필은 아무래도 어른이 정갈하게 깎은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은 꼭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야 했을까? 워낙 미술학원들이 입시 결과를 좋게 내기 위해, 아이들에게 조금 더 세게 말한다고는 하는데, 꼭 저렇게 말해야 했나 싶었다.

저 말뿐 아니라, 선생님은 한술 더 떴나 보다. 연필 모양이 엉망이니까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거다, 연필이 중요하다. 혹시 엄마가 연필 깎을 줄 모르냐면서, 학원 오면 가르쳐준다고 까지 했단다. 그 말을 하면서 처음으로 딸은 울었다. 매일 몇 시간씩 그리며 힘들 텐데도 단 한 번도 힘들단 말을 한 적 없는 딸이 집에 오자마자 우니까 마음이 더 속상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을 원망했지만, 이내 연필 하나 깎아주지 않았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왜 그런 고집을 부렸을까… 다른 엄마들은 연필 깎는 시간에 아이가 한숨이라도 더 자야 한다는 글을 보면서도 나는 ‘자기 것은 자기가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엄마들은 왜 이렇게 유별날까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 무슨 고집이었을 까 싶다.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려놓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는 아이 앞에서 나는 연필 깎기를 시작했다. 연필이란 전동 연필 깎기로만 깎아 봤던 나는 마흔 살 넘어 처음으로 매일 10자루 이상씩 연필 깎기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내가 깎은 연필은 일자로 고르지도 못하고 울퉁불퉁했고 연필 끝이 뾰족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유튜브를 봐도 잘 모르겠어서 결국 엄마찬스를 썼다.

내가 어릴 때
친구들 연필 다 내가 깎아줬잖아~


엄마아빠 시대에는 연필 깎던 시대였다며, 이런 것쯤이야 눈 감고도 깎는다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엄마가 새 연필의 모양을 내면 아빠가 연필심을 아주 섬세한 손놀림으로 매끄럽게 깎아 주신다. 두 분이 한 조를 이루며 분업하여 깎으니, 순식간에 연필 한 다스는 끝이 났다. 연필 깎는 것도 능력인가 보다. 깎아 보니 손에 힘을 주는 강도에 따라 연필이 깎기는데, 직접 하고 나서 보니 딸이 고사리 손으로 연필 깎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해졌다. 어른도 이리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데, 어린 딸이 연필을 잘 깎여졌을 리가 없다. 그러니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이쪽으로 이사 왔어.


작년에 우리 집 근처로 오신 부모님은 밥 먹다 말고 연필을 깎으며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웃으시면서 빠른 손놀림으로 연필을 깎고 계셨다. 그러면서 아예 연필을 이쪽으로 주문하라고 하셨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손녀가 그림이라도 잘 그리게 연필이나 깎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손녀딸이 내가 깎은 연필로 그림이 잘 그려져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참 나는 부족한 엄마, 부족한 딸인가 보다. 여전히 어엿한 1인분 사람이 되려면 멀었나 보다.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나 많은 연필을 깎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언젠가 보이지 않는 손놀림으로 연필을 아주 깔끔하게 깎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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