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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Jan 24. 2022

나에게는 시어머니가 두 분 계십니다.

 나에게는 두 명의 시어머니가 계시다. 한 분의 어머님은 내가 결혼하기 1년 전에 돌아가셨다. 딱 3번 정도 뵈었다. 한 번은 처음 남편 집에 잠깐 갔을 때 현관문 앞에서 인사를 드렸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근교에 식사를 하러 갔을 때 뵈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어머님이 아프시면서 중환자 실에 누워 계셨을 때의 일이다. 그렇게 3번 뵌 후에 어머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오래 아프셨던 어머님을 보낸 남편 그리고 아버님과 형님의 슬픔을 내가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머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다음 해에 나와 남편은 결혼을 했다.

 처음에는 혼자 계시는 아버님이 걱정되어 자주 찾아뵈었고 식사도 챙겨 드렸다. 그러나 당시 나는 대학원을 다니느라 바빴고 요리의 '요'자도 모르며 자랐던 온실 속 화초였던 나는 거의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아 아버님을 챙기는 수준이었다. 나보다 형님이 아버님을 알뜰하게 챙기셨다. 그렇게 1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님이 우리 모두를 불렀다.


"결혼하려고 한다."


 경상도 분이신 아버님은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고 조금 독단적인 부분이 있으셨다. 앞뒤 설명 없이 결혼을 하신다니? 연애를 하고 계셨다는 이야기인가?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모두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남편이 입을 제일 먼저 열었다.


"아버지, 축하드려요. 그런데 새어머니는 어떤 분이시죠?"


 나는 옆에 계신 형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미 형님은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연애를 하신다는 말은 건너뛰고 바로 결혼을 하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버님은 새어머니를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좋으신 분 같아서 함께 살기로 했다고 하셨다. 성격만큼 담백한 아버님의 설명을 뒤로하고 우리는 집에 왔고 곧바로 형님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이 결혼 인정할 수 없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결혼이냐는 다소 격앙된 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아버지와 똑같이 남성이라 그런지 몰라도) 아버지도 아버지 인생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누나를 설득시켰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 부모 이기는 자식도 없다. 어찌 부모의 결혼을 자식이 막을 수 있을까. 아버님은 얼마 후 새어머니를 인사시키는 자리를 마련하여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새어머니는 인상이 좋으셨다. 그래서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버님은 양가끼리 조촐한 식사자리를 마련한 후 새어머니와 함께 사셨다. 새어머니는 아버님과의 결혼이 처음이셨다. 그리고 알고 보니 나의 고등학교 대선배셨다. 나보다 늦게 이 집안에 시집오신 새어머니. 새어머니는 결혼이 처음이라 그런지 집안일이 능숙하지는 않으셨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계셔서 그런지 요리 또한 나만큼 서투르셨다. 정말 다행이었다. 마치 갓 시집온 며느리가 두 명 있는 것 같았고 나에게 동지가 생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아버님의 결혼을 기다렸던 것이 나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며느리들은 간섭하는 시어머님 등살에 못살겠다고 하지만 나는 어머님이 나보다 이 집안에 늦게 들어온 후배(?)라서 마치 내가 새어머니께 가르쳐 드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내가 첫아이를 낳은 후 가끔 새어머니가 아기를 봐주셔야 할 때가 있었다. 나도 초보 엄마였지만 새어머니는 자식을 낳아 보지도 못했는데 손자부터 생긴 셈이다. 아이를 봐주셨던 그 두, 세 시간이 새어머니한테는 정말 24시간처럼 느껴지셨을 것이다. 새어머니는 내가 집에 오면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셨고 우리 집에서 줄행랑을 치셨다. 기저귀도 잘 갈지 못하셨고 아기를 안지도 못해서 늘 유모차에 태워 아파트 주변을 돌고 계셨다. 힘드셨을 텐데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손자를 잘 봐주셨다.

 신혼 때는 마치 내가 선배인 양 새어머니께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새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결국 여느 집처럼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로 안착한 것이다. 점점 새어머니는 이 집안에서 세력을 확장하셨고 나는 점점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새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집착은 없으셨다.


 새어머니는 메이크업 쪽 전문가셨다고만 들었다. 그러나 메이크업 전문가 치고는 너무나 수수하게 하고 다니셨다. 화장 한 번 하는 것을 못 봤고 옷도 늘 같은 옷만 입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나의 화장을 보고 살짝 지적질을 하셨는데 속으로 '화장도 안 하시면서... 직업병이신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메이크업을 받을 일이 있어서 어느 미용실에서 메이크업을 해주시는 분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어머님도 이쪽 전문가시래요'라고 말했다. 그분께서 그러냐면서 성함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서 나는 새어머니 성함을 말했다.

"어머, 알아요. 거의 1세대 시잖아요."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었기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가끔 새어머니가 예전에 영화 촬영장에서 어떤 배우의 메이크업을 해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난 그때만 해도 메이크업해주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나름 업계에서 유명하신 분이었다. 사실 그때부터 새어머니가 다르게 보였다.


 이제 새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이다. 새어머니는 오랫동안 교수직에 계셨기에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놓지 말라고 늘 말씀해 주셨고 그렇기에 우리 아이들을 봐 달라고 부탁드리면 육아가 서투름에도 불구하시고 거절 한번 안 하시고 봐주셨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 집안에 비슷한 시기에 시집 온 새어머니와 나는 가끔 티격 티격 하지만 결국 아버님과 남편 흉을 볼 때는 그 누구보다도 손발이 잘 맞는다. 지금까지 평화롭게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 가끔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좋으신 새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우리 가정이 행복할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어쩌면 내가 제일 복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 집안의 어엿한 가족이 된 나와 새어머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무탈하게 지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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