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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Jan 31. 2022

당신에게 귀인이 있나요?

- 내가 통역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난 네가 외교관이 될 줄 알았어."


 거의 20년째 연락을 하는 나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아직도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어렸을 적 일본에서 오래 살다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사교성 좋은 성격 때문일까? 그러나 사실 그 이유만으로 외교관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 사실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옆에서 자주 들었던 것이 두 나라를 잇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렴풋이 나도 아버지처럼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학창 시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느라 바빴다. 엄마가 불러오신 과외 선생님이 오시면 그냥 공부했고 학원을 끊어 놓으시면 엄마 차를 타고 학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공부 한 끝에 성적에 맞춰서 취업이 잘 된다는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복수 전공으로는 일본어과를 선택했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일본 기업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어떤 공부를 했는지 사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부동산 법인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분명 어디선가 배운 회계 처리, 그리고 재무제표 등을 활용해야 하지만 대학 졸업 후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다. 4년 동안 나는 무슨 공부를 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대학을 다니면서도 얻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 대학, 그리고 경영학 전공을 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내 인생의 중요한 멘토를 만났다.


 나는 방학 때마다 인턴은 열심히 지원했다.  왜하면 그 당시 인턴 경력이 있어야 취업이 잘 되었었다. 나는 3학년 2학기 겨울 방학에 롯데 백화점의 경영지원팀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인턴을 하던 중 어느 날 롯데백화점과 일본의 한 유통업 컨설팅 회사와의 미팅이 있었다. 나는 일본어를 잘한다는 이유 만으로 그 회의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내 인생 첫 통역 회의가 되었다.

 무슨 인턴생이 롯데 백화점 임원진들과 일본 컨설팅 회사의 사장님 회의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귀인을 만났다. 바로 일본 컨설팅 회사의 여자 사장님, 우에다 상이다. 그녀는 당시 나이 50대 정도로 나랑 나이가 비슷한 딸이 있었다. 백발의 그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서 배워본 적도 없던 통역을 열심히 했다. 2시간가량의 임원진 회의를 겨우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또 통역할 기회가 있으면 함께 하고 싶네요. 당신의 통역은 매우 힘 있고 강약이 확실해요."


 처음 통역을 한 나에게 최고의 칭찬이었다. 사실 나는 인턴 생활이 끝나면 1년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1년 정도 어학연수를 갈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을 그녀에게 말했더니 잘 되었다며, 일본에 오면 같이 일을 하자고 명함을 주시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그다음 해 나는 도쿄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하러 갔다. 우에다 상의 명함을 보물 다루듯 지갑에 고이 모신 후  일본으로 들고 갔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흔쾌히 그녀의 사무실 주소를 알려 주셨고 우리는 일본에서 만났다. 그녀의 사무실은 도쿄 내에서도 고급 주택이 위치한 곳에 있었고 그녀의 성격을 나타내듯 사무실 또한 온화하고 깔끔했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 회사에서 나는 일본에 있는 1년 동안 통번역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인턴 때 내가 통역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임원급 회의 후 롯데백화점은 우에다 상 회사로부터 컨설팅 업무를 받게 되었다. 1년 동안 롯데백화점 실무진들이 일본으로 출장을 오면 내가 우에다 상과 동행하여 통역을 했고 자료 번역 또한 내가 맡았다. 그렇게 그녀와 일하면서 일본 유통업계에 대해 깊이 배울 수 있었고 또한 일본의 서비스 정신을 우에다 상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매우 개인주의가 강하고 선을 명확히 긋는 것 같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겪어 본 일본 사람 중에는 우에다 상처럼 매우 친절하고 또한 예의 바르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줄 줄 아는 배려 깊은 사람들도 많다. 우에다 상은 내가 홀로 일본에 와서 지내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친정 엄마처럼 잘 챙겨주시면서도 업무적으로는 매우 카리스마 있게 나를 가르쳐주셨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통번역 업무 말고도 커피숍에서도 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시급 계산은 매우 칼 같다. 내가 업무상 이동하는 교통비를 모두 청구하면 다 정산을 해주었고 시급 계산을 할 때에도 연장 업무를 본 1분까지 칼 같이 추가 수당으로 쳐 주었다. 그래서 매우 바쁠 때에는 한국 신입사원 월급만큼 받는 달도 있었다. 그러나 돈 보다 나는 살아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고 내가 언제 이런 실무진들과 일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회였다.


 이제 그녀는 70세를 훌쩍 넘었다. 몇 년 전 일본으로 놀러 갔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드렸고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풋풋한 학생이었던 나를 기억하는 그녀는 내가 아이 둘을 가진 엄마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고, 나는 그녀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했다. 나를 만나러 온 날도 그녀의 딸이 미국에서 오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일 먼저 만나러 와 주셨다. 다만 저녁 식사만 간단히 하고 딸을 마중 나가야 한다고 헤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20대의 나를 보고 '통역사'의 소질을 알아 봐 주시고 1년 동안 그녀와 일하면서 서비스 마인드를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었다. 내가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훗날 통역 대학원에 도전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통역사라는 업을 삼고 있다. 그녀는 나의 소질을 알아봐 주신 귀인이면서도 그녀는 나의 롤모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우에다 상. 자신의 꿈을 끊임없이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려고 한다. 그녀를 보면서 나도 60,70세가 되어도 그녀처럼 건강하게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즐겁게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끔 당신의 어머님이 주신 김치가 그리워요."


 예전에는 메일이나 연하장으로 연락했는데 이제 시대에 발맞춰 라인(LINE, 일본의 카카오톡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오래전 그녀가 한국에 놀러 왔을 때, 한국의 가정 김치 맛이 평소 궁금하다고 말했던 그녀를 위해 나는 우리 집 김치를 조금 싸서 드렸던 적이 있다. 아직도 그녀는 그 김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녀의 회사에서 일했던 1년 동안, 그녀는 롯데백화점과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말을 잘 알아야 한다며 나에게 주말마다 한국어 과외를 받았을 정도로 한국을 알고 싶어 했고 사랑했다. 어쩌면 그녀와 같은 사람이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데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늘 한국과 일본 사이는 기본적으로  관계가 좋지 못하고 특히나 어떠한 정치적 이슈가 터지면 더더욱 양국 관계는 악화된다. 정치적으로 이슈가 터질 때마다 타격을 받는 것이 바로 우리 통역사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만나는 양국의 실무진들은 오히려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우에다 상처럼 긍정적으로 양국을 바라보며 두 나라를 좋게 이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도 사실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나쁘다고, 싫다고 안 보고 살 수 없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접해있는 한 서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명하게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양국이 밝은 미래를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내가 작게나마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지금도 통역 프리랜서로서 나는 자긍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다. 통역 회의 전 10년 차 프리랜서임에도 불구하고 떨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마다 외우는 마법 같은 주문이 있다.

'나는 매우 힘 있는 통역을 하는 사람이다.'

 20년 전 우에다 상의 칭찬이 나에게는 용기를 주는 하나의 주문이 되어 버렸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회의를 할 때마다 그녀에게 감사하다. 또다시 그녀와 건강하게 만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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