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시리즈 (10) 그림책 수업을 마무리하며
추운 3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엄청난 언덕을 올라 처음 학원 강의실에 발을 들였던 것이 엊그제 같다. 어느새 추운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앞둔 지금. 그림책 수업은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아이들과 책육아를 10년 넘게 해오면서 내 마음은 그림책에 퐁당 빠져 버렸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나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라는 작은 꿈을 마음속으로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본업인 통역 외에도 법인회사, 빨래방 등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그 꿈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한테만 들리는 마음의 소리였다. 그러다가 2년 전 디지털 드로잉을 배우게 되면서 조금씩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더 늦기 전에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날이 왔다.
나, 그림책 만드는 수업을 들을까 해.
그렇게 가족에게 선포를 하고 나는 적지 않은 (아니 매우 큰 금액의) 수업료를 내고 무려 6개월, 주 2회 기본 4시간 수업을 덜컥 등록했다. 나는 반드시 올해 끝내고 싶었다. 사실 찾아보면 수많은 그림책 수업이 있다. 그림책 작가들이 하는 수업도 있지만 작가가 아닌 분들이 여는 수업들도 정말 많다. 그러나 나는 이왕 할 거면 한 번에, 빡쌔게 배워서 끝내고 싶었다. 질질 끄는 것은 내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나는 그림책을 만드는 일 말고도 또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1주일에 2번, 나는 아이들에게 아침만 챙겨주고 출근시간 대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실은 체, 1시간 걸려 학원에 도착했다. 수업 시간보다 늘 일찍 간 나는 가서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면 크로키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며 나만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했다.
왜 이렇게 일찍 오세요? 할 일이 없나 봐요~
처음 선생님의 말씀에 상처 아닌 상처를 받았다. 내가 얼! 마! 나!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그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여기 앉아 있는데, 늘 수업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오는 내가 의아했는지 그런 질문을 하셨다. 처음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나에게 무슨 일을 하시냐는 선생님 질문에 '이때다!'하고 내가 하는 일을 줄줄이 읊었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터 선생님의 태도가 180도 바뀌면서 나를 신기한 시선을 바라보셨다.
나는 나름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그림 잘 그리시네요' '센스가 있으세요'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사실 비전공자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솔직히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욕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림책 수업에 임했다. 그러나 수업에 가보니 미대 (또는 디자인 계열) 졸업자 분들이 반 정도 되면서 나의 자존감은 수업 회차가 거듭할수록 바닥으로 향해 내달렸다.
자기는... 센스가 부족해, 알지요?
열심히 하는 건 인정해요.
자기처럼 그림 그리는 학생이
이렇게 마지막까지 수업을 들은 것은
내 빅데이터 상 처음이야.
그랬다. 나는 미술을 공부해본 적도 없는 아마추어라서 그림 그리는 것에 서툴렀다. 이렇게나 서툴 줄은 사실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손가락 만한 사이즈의 이모티콘을 그리던 사람이라 A4수준의 넓은 용지에 배경 꽉 차게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나의 비참한 그림 실력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몇 달은 그것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려 인스타에 올리던 습관도 어느 순간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나의 인스타를 팔로우 하셔서 나의 그림을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음지에서)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그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더 쓸 수밖에 없었다. 학원을 빠질 수 조차 없었다.
6개월 동안 나는 아이들과 휴가 가느라 빠진 이틀 빼고는 학원에 매번 갔다. 아마 나처럼 안 빠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금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지금 아니면 그림책을 못 만들 것 같았다. 선생님 없이 나 혼자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만들 수야 있겠지만 '그렇고 그런' '흔한' 그림책이 아닌 철학이 담긴, 읽고 또 읽고 싶은, 소장하고 싶은, 볼거리가 많은 그러한 그림책을 만들려면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꼭 그러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정말 많이 늘었어요. 훨씬 그림이 풍부해졌어요.
이렇게 칭찬을 받기까지 5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아직은 센스가 부족하다(고 한다). 센스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요즘 나의 그림을 보고 예전보다 흡족해하신다. 많이 좋아졌다고 말이다. 동기들은 말한다. "꾸준함에 놀라워요." 그렇다. 나의 유일한 장점이 이 그림책 수업에서도 발휘된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센스도 없고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적 사고도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더욱더 나는 수업에 빠질 수가 없었다.
양질의 그림책 수업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 외에 이 수업의 장점이 바로, 이렇게 많은 미대생들을 내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내 친구들 중에는 미대 나온 친구가 한 명도 없었는데 이 수업에는 많은 분들이 미대 졸업자이시다. 그분들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전시회에 온 것만 같았다. 나는 장난으로 "여보, 홍대 미대를 다시 가고 싶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나도 미대를 나오면 저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기가 없는 나에게 미대에 가서 기본부터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미대 친구들(물론 직업 및 나이는 다양하지만, 일단 동기니까)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림책 수업은 이제 8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고 앞으로 3달 동안 한 달에 1번 모여서 피드백을 해주시는 보너스 수업이 남아 있다. 나는 이제 그림 하나하나를 완성도를 높여서 그리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책도 썸네일 스케치 중이다. 나의 목표는 올해 안에 출판사에 제안해 볼 수 있는 스케치를 완성해서 다 넣어보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나의 목표는 성공인 셈이다.
바닥으로 떨어졌던 나의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되었을까?
나는 다시 원래 속해있던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바로 NFT작가가 되는 수업이다. 나의 그림은 미대생들이 보면 형편없는 그림일지 모르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어쩌면 나의 그림은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그림을 따뜻하다고 좋아해 주는 팬분도 간혹 계신다. 나는 나의 그림의 장점을 이끌어주는 커뮤니티에서 다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조금씩 자존감을 살리는 중이다. 이제는 다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내가 즐기면서 그리는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아직은 갈 길은 멀지만 이렇게 그리다 보면 나도 미대생들이 칭찬해줄 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내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그리고 미대는...미대 친구를 많이 사귄 것으로 만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