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을, 첫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첫사랑에 빠졌다. 첫아이와 첫사랑에 빠졌다? 아니다, 나는 '그림책'과 첫사랑에 빠졌다.
어려서 나는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다정하셨지만 나에게 책을 읽어주신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책이라고는 일본에서 넘치고 넘치던 만화책이 전부다. 그래서일까? 첫아이와 함께 읽기 시작한 그림책은 나에게 첫사랑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진하게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방법조차 몰라서 글로 배웠다. 그러나 육아는 늘 종이에 적힌 글대로 적용되지 않는 분야다. 내 아이와 엄마인 나의 상황, 그리고 가족의 상태에 따라 맞춤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금방 깨달았다. 그로부터 나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내가 느끼는 대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어서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많았고 또한 도서관을 매주 다니면서 많은 그림책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책과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아이와 함께 읽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림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럭비공과 같은 존재라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 내가 A라고 말하면 아이는 늘 ㄱ이라고 말했다. 내가 전하려는 그림책의 의도와는 다르게 느끼는 아이들. 그런데 그 아이의 생각은 늘 놀라웠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그래서 그림책이 만들어진 배경, 작가의 의도, 그림책의 주제와 같은 것이 아이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들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는 시간에, 차라리 한 권이라도 더 그림책을 읽어줘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아이와 그림책을 읽은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집어 든 그림책이 이제는 나를 위해 그림책을 고르고 있다. 어느 정도 아이가 혼자 책을 읽게 되면서 그림책을 함께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아이도 혼자 읽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에 혼자 읽는 시간이 길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전에는 엄마의 품에서 엄마의 목소리로 그림책을 읽고 싶은 것은 1살 때나 10살 때나 똑같은가 보다. 어찌 되었든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나는 나를 위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달에 몇 권씩 새 그림책을 주문해서 읽는 나를 보고 남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른이 왜 그림책을 읽어?
그것은 단 한 번도 그림책을 깊게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권의 교양서나 인문서보다 한 권의 그림책이 훨씬 더 내 마음에 깊이 그리고 진하게 다가온다. 그림책은 적은 페이지수에 적힌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제한된 페이지에 명확한 주제가 담겨 있고 그 주제를 글과 그림이 왈츠를 추며 그려내고 있다. 글뿐 아니라 시각적인 그림이 덧붙여 있어서 더 상상하기 좋고 눈이 즐겁다. 그래서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다. 시각적인 그림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와 깊이 읽은 그림책이 훨씬 더 오랜 시간 기억에 남고 또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렇게 그림책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나는 그림책을 메이트님과 함께 읽으며 나눔을 하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고 그림책을 출간해야겠다는 꿈도 가지게 되었다. 성인과 함께 읽는 그림책은 아이와 함께 읽었던 그림책과는 또 다른 맛이다. 요즘 같은 바쁜 일상 속에서 성인들이 함께 모여 그림책을 함께 읽고 생각 나눔을 할 기회가 흔하지 않다. 매개체가 그림책일 뿐이지, 그림책을 통해 나의 가치관, 지금의 나의 모습, 과거의 나를 만나는 시간 등을 가지며 나를 알아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함께 <누군가 뱉은> (경자 글 그림)이라는 그림책을 읽고, 지금껏 내가 내뱉은 말 중 후회되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나 또한 후회하고 있지만 사과를 하지 못한 기억이 있어 함께 나누었는데,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하셨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나는 그림책 한 권을 읽고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았고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이러니 그림책을 사랑할 수 밖에!
그렇게 그림책과 진한 사랑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사랑스러운 그림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29살에 빠진 첫사랑, 그림책. 1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 첫사랑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다. 여전히 그림책 앞에 서면 가슴이 설레고 미소 짓게 된다. 책꽂이에서 그림책을 꺼내는 순간, 마치 첫사랑과 처음 손을 잡는 것처럼 손이 떨린다. 책 표지를 유심히 보며 나는 '너는 어떤 아이야?'라고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칠 때에는 첫사랑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설렘을 안고 읽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림책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벌써 헤어지냐며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만난 나의 첫사랑은 언제든 내가 만날 수 있는, 눈에 잘 보이는 책꽂이에 가지런히 모셔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