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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Oct 10. 2022

20년만의 그녀와의 재회

나의 플루트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그녀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 단발머리의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눈빛으로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위층에 사는 선생님 집에 갔다. 선생님은 매우 온화하신 분으로 그녀와 내가 합을 잘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처음에 그녀는 나를 다루는 것을 힘들어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손으로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호흡까지 해야 완전히 나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나를 온전히 다루기까지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녀는 선생님 집에서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에서도 자주 나와 놀았다. 다만 오래 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와 오래 놀면 현기증이 나기 때문이다. 나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부하다가 지칠 때면, 종종 나를 불러 놀았다. 놀고 난 후 그녀의 기분은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도 그녀와 함께 노는 시간을 기다렸다.


 언젠가는 한번 학교 음악 시간에 나를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소개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선생님 집에 더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사실 나는 너무 떨렸다. 지금껏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심지어 나는 처음 간 그녀의 학교에서 그녀와 함께 노래를 불러야 한다니...

 선생님은 그녀에게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추천했다. 나는 그 곡을 처음 듣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나 도입부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녀와 이 곡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러나 설레는 나와 달리 그녀는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불었던 곡과는 달리 조금 길었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습하던 그녀는 가끔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 나와 그녀는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멋지게 <G선상의 아리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나와 그녀는 정말 기뻐했다.


 그러다가 아쉽게도 위층에 살던 선생님이 이사를 가시면서 그녀와 내가 노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3을 맞이했고 공부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방 한 구석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꺼내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는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동그랗게 앉아서 나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들 손에도 나와 똑같은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주일에 한 번, 그녀의 퇴근 후 문화센터라는 곳에서 함께 다시 놀 수 있었다. 어느새 어른이 된 그녀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보다 더 나를 반갑게 마주해 주었고 또한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더 온화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나를 잊었는지, 다시 방 한 구석에 나를 두고 떠나버렸다. 나는 또다시 기다렸다. 다시 그녀가 나를 찾아주기를... 나를 기억해 주기를...

 그렇게 긴 긴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나의 거처는 2번 바뀌었다. 나는 어디인지 모른 체 그냥 계속 장롱 속에서 살았다. 그녀가 나를 다른 곳에 보내지 않았음에,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장롱 속에라도 있을 수 있어서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았다. 그녀 옆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플루트 소리 정말 좋아. 잘 들어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부드럽게 안더니, 20년 전에 불렀던 <G선상의 아리아>를 불러주었다. 정말 신기했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 곡을 그녀와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10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와 멋지게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한 것이다.


 잠시 후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리코더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나와 함께 <A Whole New World(알라딘 OST)>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반주를 치고 있었으며 남자아이는 내 옆에서 함께 화음을 넣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그녀의 방,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그렇다, 나는 캄캄하고 답답했던 장롱 속에서 나와 이제는 그녀가 잘 보이는 곳에 온 것이다.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의 호기심 어린 눈빛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 있던 남자아이의 눈빛 또한 어렸을 때 그녀 눈빛을 닮았다. 나는 다시 설레었다. 나는 다시 그녀,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과 다시 즐겁게 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20년 전 혼자 외로워 보이던 그녀의 옆에는 이제 함께 놀 수 있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 연주를 옆에서 들어주는 남편도 생겼다. 그곳에 내 자리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자주 그녀와 어렸을 때처럼 놀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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