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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Nov 07. 2022

엄마는 주말에 출근합니다.

그리스 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 내일 4시랑 8시에 회의 있어."


 코로나가 터지면서 나의 본업은 대부분 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코로나 전에는 1시간에 걸친 회의를 하기 위해 1시간 전에 집을 나선 후, 회의가 끝난 후 집에 1시간 걸려서 집에 왔다. 당시에는 아이들이 어려서 3시간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시어머니, 엄마, 그리고 동네 엄마들께 부탁하며 일을 하러 다녔다. 다행히 풀타임 근무가 아니어서 잠깐 우리 아이들을 봐주면 되었다. 그래도 늘 조마조마했다. 학원 시간이라도 겹치면 일을 하러 가지 못했고, 누구한테 아이들을 부탁하려고 하면 늘 아쉬운 사람은 나이기에 눈칫밥을 먹으며 일을 하러 가야 했다.


 회의를 하러 가려면 단장을 해야 했다. 그래도 통역사인데, 청바지를 입고 출근할 수는 없었다. 화장도 기본은 하고 가야겠다. 그러다 보니 옷을 안 살 수가 없었고 화장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회사가 백화점과 연결되어 있어서, 퇴근하며 옷을 구경하다 보면 하나 둘 옷을 사게 되었다. 왕복 교통비도 들고 커피 한잔 도 사 먹어야 하고, 밥시간이랑 겹치면 끼니도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돈을 벌러 나갔지만 돈을 쓰러 나간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회사가 모두 재택근무로 바뀌었고 통역사 또한 집에서 줌에 접속하게 되었다. 사실 초반에는 '나 이제 뭐 먹고살지...'라며 그나마 하던 통역일이 끝나는 걸까, 우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차 줌 회의가 많아지면서 나에게는 더없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우선 아이들을 맡기지 않고 방 문만 받으면 1시간 통역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아이들은 그때보다 커서 1시간 정도는 놀이터에 나가서 놀거나 집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다. 다만 가끔 시끄러운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도 주의를 주면 어느 정도 컨트롤 가능하다. 더 이상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맡기지 않아도 된다. 이 점이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이를 맡기다 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안 할 수가 없다. 이래저래 신경 쓰이던 부분이다.


 그리고 회의 시 통역사는 카메라를 켜지 않아도 되어서 나는 늘 홈웨어 차림으로 통역에 임한다. 그리고 화장도 안 한 민낯으로 통역을 한다. (가끔 세수도 안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옷을 살 이유도 없고 화장품도 안 사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커피를 타서 마시면 되고 교통비도 들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는데 집에서 일하다 보니 당시 내가 쓸데없는 돈을 많이 썼구나, 후회가 되었다.


 이러한 많은 제약들이 없어지다 보니 저녁 8시 회의, 주말 회의들도 가능해졌다. 아이들 저녁을 다 먹이고 씻긴 후, 나는 방에 들어가서 통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말에도 아이들이랑 남편이 놀러 나간 시간에 회의를 하기도 한다. 아직은 해 본 적은 없으나 여행을 가서도 조용한 장소만 확보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회의가 가능할 것만 같다.




 통역 대학원을 졸업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사실 그 사이 육아를 하느라 경력이 중단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1년 정도는 풀타임으로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어떨 때는 회의가 전혀 들어오지 않아 '난 이제 통역 일은 못하는구나'하며 우울해하던 시기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계약직도 아닌 그냥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회의가 많을 때만 불려 가기 때문에 수요를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비성수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은 가을 성수기라 그런지, 회의가 많아서 자주 불려 가고 있다.


 통역 대학원을 졸업하며 남들은 기업에 취직해서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거나, 멋진 프리랜서로 활약하며 국제회의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사실 지금도 부럽다. 나도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으며 멋진 무대에서 통역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운동화만 고집하고 바지를 입어야 편한, 아이 둘 엄마이다. 처음에는 나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서 몇 년 동안 우울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방황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에서 이렇게 통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인 것 같다.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겨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출근을 하지 않기에 또 다른 빨래방이나 부동산 일, 그리고 그림 그리는 일 등을 할 수 있다. 물론 또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는 회의 통역이다. 아마 또 언젠가 그런 시기가 오리라 생각한다. 늘 불안정한 것이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번 겪어봐서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또다시 그런 위기가 닥치더라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안다. 그래서 지금이 더없이 소중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었던 일을 이렇게 소소하게라도 할 수 있는 '지금'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족 하브루타 시간에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기에 큰 아이가 중학교 가기 전에 한번 그리스 여행을 가자며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리스 여행 경비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인 가족이 1주일 정도 가려고 하니 돈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예산을 보고 남편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예산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였으리라.

"엄마가 요즘 돈 열심히 벌려고 하는 거 알지? 그래서 말인데, 엄마가 번 돈은 여행 통장에 다 넣어서 나중에 그걸로 여행 갈래?"

제일 먼저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남편은 의아해하면서 '얼마를 벌고 있느냐. 그게 가능한 거냐'라고 물었다.

"왜~ 난 이번 달도 65만 원 벌었어~ 그리고 내년부턴 100만 원이 목표야~"

남편은 놀라는 눈치였다.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네. 천만 원 언제 버나, 걱정했는데 든든하다!"


그렇게 나는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나니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되었다. 회의 통역이 들어오면 가능하면 모두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그림으로 수익화하는 일도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아직은 모두가 미미한 수준이지만 확실한 목표가 생기고 나니 의지도 불타올랐다. 이제는 필요 없는 옷이나 화장품을 사지 않는다. 커피도 이유 없이 사 먹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다 도전해 본다. 그렇게 내 꿈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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