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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Jan 30. 2023

어른이지만 그림일기를 씁니다

그림일기 600일을 쓰며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쓰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자의든 타의든 일기를 썼던 기억이 있다. 방학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일기 숙제가 나왔고 언제나처럼 일기는 개학 전에 한꺼번에 쓰기 일쑤였다. 왜 일기를 쓰라고 하지? 그 누구도 나에게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만 내 일기를 보고 검사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3을 졸업하면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말이다. 일기를 썼던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을 기록하기 위해서.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친구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사귀게 되면서 일기를 다시 쓰게 되었다. 일기에는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친구와 즐거웠던 첫 데이트, 싸우고 나서 나의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쓴 편지, 그리고 차마 그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 나의 첫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당시 글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내 마음을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일기장을 보면 20대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분명 내가 겪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듯 재미있게 읽게 된다. 물론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다.


내가 주인공인 일기를 쓰다가 돌연 주인공이 바뀐 시기가 있었다. 바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이다. 10개월 동안 배 속에 품고 함께 한, 작고 소중한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육아가 고되고 힘들었지만 육아일기를 포스팅할 때만큼은 힘든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 그리고 아기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1년 열심히 포스팅했던 블로그 글들이 모두 지워진 사건이 일어났다.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그동안의 포스팅이 다 삭제되자 나는 멘붕이 왔다. 네이버에 문의 메일도 넣어봤지만 답변은 '복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왔다. 술을 좋아하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내 돈으로 소주를 사서 마셨던 날이다. 그 사건 이후로 포스팅 때 정말 조심한다. 내 손가락이 맘대로 움직이지는 않는지 감시를 한다.


그렇게 10여 년 주인공이 아이인 일기를 쓰다가 문득 '왜 나는 내 이야기를 적지 않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이것도 어느 정도 아이를 키워서 여유가 생겨서 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림일기를 같이 쓰는 온라인 모임이 있다고 하여 바로 가입했다. 그림일기,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레었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그림일기를 썼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인 것 같아서 기대가 되었다.


'킨더줄리'라는 공간의 줄리 님의 그림일기 클래스에 참여하면서 나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처음 사용하게 된 나는 킨더줄리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배웠고 일기를 꾸밀 수 있는, 일명 다꾸 스티커도 내가 그려서 내가 쓸 수 있는 기술도 익혔다. 그리고 이미 몇백 일 동안 그림일기를 꾸준히 쓰신 줄리 님의 일기를 보며, '나도 언젠가 그림일기 100일이라는 날이 오겠지?'라는 꿈을 꾸며 무작정 따라갔다.


아니, 얘도 아닌데 왜 그림일기를 써?


그림일기를 쓰는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남편이 물었다. 처음에는 나도 왜 그림일기를 쓰는지 남편에게 대답을 시원하게 못했다. 그러나 어느새 100일, 200일 그리고 지금은 600일을 넘기면서 남편은 나에게 묻지 않는다. 오히려 "얘들아, 엄마 일기 쓰니까 조용히 하자." "너네도 일기 쓰는 시간 가지는 게 어때?"라고 말해준다. 여전히 남편에게 그림일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집어서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남편은 느끼고 있다. 내가 일기를 매일 이렇게 쓰면서 변했다는 것을 말이다.


일기를 쓰는 시간이 처음에는 30분씩 걸렸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썼고 사진도 첨부했다. 마치 하루의 1초라도 잊으면 안 돼!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점점 일기를 쓰는 30분이 버겁게 느껴졌다. 일기는 저녁에 쓰기 마련인데 저녁 시간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바쁘다 보니 부담스러운 시간처럼 다가왔다. 그러다가 일기를 조금 더 간편하게 쓰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한 가지 일, 또는 감정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여전히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에게 그림은 하나의 언어이다. 그림 언어.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덕분에 매일 그림도 그리다 보니 그림 실력도 늘었고 나만의 그림 스타일도 정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림일기를 쓰는 시간을 정하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을 때 적는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지금의 나의 감정을 남기고 싶을 때, 그냥 쓰윽 꺼내서 5분 만에 일기를 적는다. 그렇게 나는 600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기록했다.


그림일기를 적으며 나는 온전히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표현하지 못한 내 마음을 글로, 그리고 그림으로 적는다. 어떤 날은 너무 기쁜 일을 적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 없이 슬프고 무기력한 나를 기록했다. 혼자 일기를 썼다면 쓰다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일기를 보고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 주고 때로는 위로해 주고 응원해 주는 메이트님들이 있어서 나는 위로받으며 매일을 살 수 있었다. 날 것의 나를 적을 때 처음에는 부끄럽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날 것의 나를 그대로 적어도, 그리고 때론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메이트님들이 있어서 힘이 된다.


일기를 쓰며 늘 나에게 질문한다.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니?


아마 인간이라면 평생 죽을 때까지 고민하지 않을까? 마흔을 앞둔 나도 매일 질문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일기를 쓰며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며, 오늘 하루는 내가 살고 싶은 하루를 보냈는지 되돌아본다. 내가 원치 않은 삶을 산 날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 어떤 하루도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원치 않은 하루를 보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는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일은 더 나은 하루를 보내자고 다짐한다. 그렇게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 몸이 건강하기 위해 비타민을 매일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리고 몸에 좋다는 것은 너도 나도 찾아 먹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내 건강한 정신을 위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까? 하루 10분이라도 내 정신을 돌보는 일을 왜 하지 못할까? 정신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비타민을 챙겨 먹고 하루 30분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듯, 매일 그림일기를 쓴다. 그림일기를 쓰며 나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고, 어제보다 나은 나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그림일기로 오늘의 나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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